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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ug 28. 2021

[10줄 문학] 고독한 생존방

2021년 8월 23일 ~ 8월 27일

1. Waiting for calling


나는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이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같이 들어온 털뭉치들은 모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사람 손바닥만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그들은 금새 누군가의 손에 들려 이 곳을 떠났다.


사람들은 간간히 오고, 갔다.

나는 나의 차례를 기다렸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내게 시선이 머무는 인간들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귀엽게 작지도 않으면서, 완전히 커버리지도 못한  어중간한 개체가 되었다.

이번에도 선택받지 못했기에 이 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주눅들게 했다.


반복되는 기대와 실망의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기다리는 호출은 결코 들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 나를 원하기만을 기다리다간, 나는 이대로 이 곳에 영영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2. 8년이나 일했으면


오늘은 컨텐츠 마케팅 서밋이 있는 날이었다.


회사에서는 내게 오전 9시부터 6시까지의 커리큘럼을 다 들으라 했지만, 당장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보고서가 있어 완전히 집중해서 보지도 못했다.

한켠에 강연을 틀어놓고 대충 귀로 흘려 들으며 눈으로는 바삐 일하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직장 생활 어느덧  8년차.


8년이나 일했으면 나는 내가 유퀴즈엔 나올 줄 알았지.

신문 인터뷰도 하고, 저렇게 어디 가서 전문가라고 강연도 하고 있을 줄 알았지.

이쯤 되면 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아, 그 사람!' 하고 알아주는 유명인이 되어 있을 줄 알았지.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게 있다던데, 1만 시간 넘게 회사에 바친 나는 그냥 나일 뿐.


현실은 아무도 내 이름을 몰라.


뭐, 그런 거지.




3. 고독한 생존방


2030년 8월, 독거 사망 방지법이 통과되었다.


2020년대부터 이어진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와 고령화로 인해 대한민국은 1인 가구 천하가 되어버렸고, 자연히 혼자 살다 아무도 모르게 죽는 사람의 비율도 늘어났다.

독거 사망자들은 죽은 지 한참이 되서 이웃 주민의 신고로 발견되거나, 키우던 고양이나 개에게 신체 일부가 파먹힌 채 발견되곤 했다.


집주인들은 점점 독거 사망의 위험을 가진 1인 가구 세입자를 꺼리기 시작했고, 이는 곧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독거 사망 방지법이 통과되자, 정부에서는 전국의 1인 가구를 조사하여 무작위로 조를 편성했다.


같은 조에 배정된 사람들 10명씩으로 구성된 오픈 채팅방이 만들어졌다.


이 방에 소속된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채팅창에 숫자 1을 쳐야 했다. 누군가 최대 48시간 이내로 생존 신고가 없을 경우엔 비상연락망을 소유한 방장이 관할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1."


이외 다른 일체의 잡담은 허용되지 않는 그 방을 사람들은 '고독한 생존방'이라 불렀다.




4. 실패한 프린세스 메이커의 고백


나의 아버지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를 매주 서점에 데려가 책을 한 권씩 사주셨고, 나는 책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어른이 된 나는 아버지가 생각했던 훌륭한 사람이 아닌 그냥 작가 지망생이 되었다.

책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책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요즘 들어 가끔씩 내 아버지의 인생을 떠올릴 때마다 아버지와 나의 지난 30여 년이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의 배드 엔딩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도덕심을 키우려고 성당 알바를 시켰더니 수녀가 되고, 체력을 키우려고 농장 알바를 시켰더니 농사꾼이 되어버린 그런 뜨뜻미지근한 엔딩 말이다.


가끔 늦은 밤 혼자 방구석에 웅크린 채 타닥타닥 타자기를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자면 어디선가 “내가 너 그렇게 살라고 어릴 때 그렇게 책을 읽힌 게 아닌데!”라는 아버지의 처절한 절규가 들려오는 것 같다.


아빠, 이번 생 버전은 배드 엔딩이라 나도 좀 유감이야.


아마도 이래서 내가 자식을 엄청 간절하게 낳고 싶지는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프린세스 메이커의 배드 엔딩 버전이나 다름없는데 누가 누굴 키운단 말인가.




5. 너의 이름은 영원


20년째 기획사를 이끌며 아이돌 산업에 종사해온 대표이사 A는 최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산업 특성상 그에게는 소속 아티스트들이 가장 중요한 재원이자 자산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인간이기에 너무도 불완전한 자산이었다.


기껏 애를 써서 대형스타로 키워놓으면 꼭 한명씩 사고를 치거나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KPOP 아이돌 연습생들의 훈련 과정의 비인권적인 측면을 본격적으로 파헤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며 KPOP의 수장인 그에게 온갖 비난이 집중되고 있었다.


지난 20년 간 수없이 반복되온 이런 일들에 대표이사 A는 몹시 지치고 현타가 왔다.

주주로부터 항의가 빗발치던 어느 날 밤 그는 서재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잠그고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서재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손에 들고 걸어나온 그는 바로 '피그말리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후 1년, 그는 모든 일을 뒤로 한채 오로지 딥 리얼 기술만을 활용하여 역대 최강의 가상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타고난 실력에는 가혹한 트레이닝이 불필요하며,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고, 각종 병크를 터뜨리지도 않으며, 열애설도 나지 않고, 초심을 잃고 동태눈깔이 되지도 않는 그들은 언제까지고 완벽할 것이었다.


마침내 데뷔가 결정된 날, 대표이사 A는 그들에게 '영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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