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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Oct 15. 2020

아이디어 회의는 누구보다 멍청하게

똑똑한 아이디어는 멍청한 대화에서 태어난다

광고대행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기선 기가 차는 회의가 종종 벌어진다고.


모 통신사의 ' GiGA TV'라는 제품 광고를 만들 때였다. 우리 팀은 본격적인 아이디어 회의 전에 편하게 얘기를 나눠보는 몸풀기 회의를 종종 가지곤 했다. 광고 아이디어에 도움이 될만한 각자의 생각을 주고받는 일종의 브레인스토밍 시간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팀장님이 팀원들을 모아놓고 가벼운 회의를 시작하는데 누군가 장난스레 한 마디를 던졌다.


"팀장님! 좋다는 GiGA TV가 이기가?"


그것은 침묵으로 가득 찬 회의실에 날리는 도전장이었다. 자, 이제부터 '기가' 드립을 시작해보도록 하죠! 모두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선배님들, 회의 시간에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거예요?' 막내였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지만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다 싶은 마음에 다들 신나게 입을 열고 떠들기 시작했을 뿐.


"저기가? 요기가?"

"이건 어때요? 기가 막히는 TV! GiGA TV!"


팀원들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광고에 필요한 아이디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먼저 웃긴 '기가' 표현을 찾아내는지가 우선이었다. 팀장님도 이에 질세라 "맞는 기가? 아닌 기가?"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절박한 감정 연기에 돌입했다.


팀장님이 호응해주니 팀원들은 더 크게 반응하는 게 인지상정. 막내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나도 "GiGA TV 드디어 사는 기가!"를 외쳤다. 그러자 "오~ 좋은데?"라고 말하며 선배들이 나를 칭찬해주는 게 아닌가. 뭐지? 왜 기분이 좋지? 근데 이런 걸로 회의 시간에 뿌듯해도 괜찮은 건가? 어쨌든 '기가'로 가득 찬 회의는 계속되었다. 30분이 넘도록 쭉.


그러다 문득 한 팀원이 다른 말을 꺼냈다.


"저희.. 이렇게 아이디어 내면 광고주 분들에게 혼나겠죠?"

"광고주가 유쾌한 광고 말고.. 제품의 혁신성을 잘 드러내는 광고를.. 해달라고 하긴 했죠.."
 "그래... 일단 열심히 해보자고..."


회의는 그렇게 급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기가' 드립과는 전혀 상관없는 광고를 최종적으로 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첫 회의는 아주 쓸모없는 것이었을까?


멍청해지자(BE STUPID)


글로벌 패션 브랜드 '디젤(DISEL)'이 10년 전에 전개한 캠페인의 슬로건이다. 똑똑해지기도 어려운데 멍청해지자니. 어딘가 이상한 주장이지만 디젤의 캠페인은 보면 볼수록 묘한 설득력이 있다. 똑똑한 사람들(SMART)은 사회가 추구하는 정답을 찾지만, 멍청한 사람들(STUPID)은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엉뚱한 도전을 하며 심지어 세상까지 바꾼다는 것. 사회를 변화시킨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엔 괴짜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의 '기가' 드립이 세상을 바꿀만한 아이디어는 아니었겠지만, 그날의 엉뚱한 회의는 적어도 나의 세상을 조금 바꾸어 놓았다. 만약 팀장님이 회의 시간에 '이기가!' 같은 장난이 웬 말이냐며 화를 냈다면 어땠을까. 아이디어 회의가 진지하고 엄숙해지지 않았을까. 서로 눈치를 보며 이런 말을 해도 되나 고민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모든 회의가 이런 식이라면 과연 재밌는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을까.


광고를 10년 한 선배든, 20년 한 팀장이든, "이기가! 저기가!"를 외치는 것을 보며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아이디어 회의라고 대단한 것만 얘기해야 하는 게 아니구나. 정답만 말해야 할 필요도 없구나. 쓸모없는 생각들을 장난스레 던질 수도 있구나. 회의실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든 화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라니. 이들과 함께라면 어떤 의견이라도 자유분방하게 나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실이 좋았다.


디젤의 '멍청해지자(BE STUPID)' 캠페인은 여러 가지 카피와 비주얼로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카피는 이것이다.


"멍청이들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대부분은 착오에 불과하다(STUPID IS TRIAL AND ERROR. MOSTLY ERROR)"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어머니를 만난다. 성공의 어머니인 '실패'가 자주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틀릴 게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보다는 아무 말이라도 일단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무용한 대화 속에서 유용한 아이디어가 태어날 수도 있다. 근사한 아이디어를 만드는 건 수많은 멍청함이 한데 모이는 일이기도 하다.


회의실에서 나누는 모든 말은 아이디어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처럼 떠든 만큼 아이디어도 거둘 수 있는 법이다. 누군가 헛소리를 잔뜩 늘어놓더라도 그것을 별것 아닌 소리라고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자세. 아무리 쓸모없는 이야기라도 언젠가 쓸모가 있으리라는 믿음. 내가 광고 회사에서 배운 아이디어 회의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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