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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Mar 13. 2021

을지OB베어를 지킵시다

동네마다 특색 있는 작은 가게가 있는 게 참 좋다. 늘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의 위협을 받기는 하지만, 멋과 맛이 살아있고 단골들과 오랜 소통 가운데 끊임없이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내는 우리 동네 작은 가게는 좀처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큰 자본이 노리기에는 다행히(!) 비교적 작은 상권이어서 그렇겠지만, 다국적 기업의 대형 치킨매장이 좀처럼 맥을 추지 못하고, 오히려 오랜 동네 통닭집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모교 주변상권이 실로 자랑스럽기만 하다.


을지로가 오늘날 힙지로로 불리게 된 데에는 매일 저녁 뮌헨의 옥토버페스트를 연상하게 하는 ‘노가리 골목’의 덕이 사뭇 크다. 노가리 골목은 1980년 대한민국 최초의 생맥주집으로 개업한, 바로 을지OB베어에서 비롯되었고..


흔히는 연결된 관만 얼려서 시원한 생맥주를 만들어 내곤 하는데 이 댁은 아예 큰 냉장고에 맥주통을 통째로 냉장보관했다가 날씨 등에 따라 특정한 온도로 따라내는 독특한 방식을 취해 오고 있다. 맥주맛을 잘 살려 주는 부드러운 맛의 노가리 안주를 생각해낸 것도 바로 이 댁이었고..


맥주를 마음껏 즐기되 고주망태가 돼 집에도 제대로 못 가고 나아가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면서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전에도 오랫동안 10시, 최근 들어서는 손님 성화에 못 이겨 11시에 정확히 영업을 마치곤 했던 소신 있는 집.


40년 동안 지역의 상징으로 성업을 해왔으면 업장이 속한 건물을 아예 사지 않았겠나 싶기도 한데 건물주와의 절대적인 신뢰 가운데 6평 업장의 지속적인 임차 이상 욕심내지 않고 다양한 이웃과 상생하며 지조를 이어왔던 을지OB베어.


그러나, 안 그래도 주위에 열 개 가까운 업장을 이미 열어 사실상 독과점 상태에 있는 후발 업소가 해당 건물을 장악한 뒤 이 지조 있는 원조 업소의 작디 작은 매장을 몰아낼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안 그래도 역병으로 뒤숭숭한 이 시기에 벌써 두 차례나 강제 퇴거를 시도했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돈은 돈일뿐 우리를 마음대로 좌우해 마땅한 초월적 존재는 아니다. 돈이 있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확인해 보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맥주집으로는 처음 ‘백년가게’로 인증한 집이다. 입구에는 ‘서울미래유산’임을 알리는 커다란 동판이 붙어있다.




2022년 4월 21일 새벽 을지OB베어는 강제집행을 당해 오랜 터전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한 몸부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귀한 것을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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