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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Sep 14. 2020

집사람을 기다리며

집사람 없이 집에 혼자 있게 된 게 딱 1주일 됐습니다.
집사람이 집에 없다니 이상하지요?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아내는 지금
장모님, 처제, 딸과 함께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중일뿐입니다.
 
'여자들끼리 3대가 여행을 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 재미를 깨지 않기 위해
또 논문을 쓴다는 이유로
저는 그 여행에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밥 해 먹고사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적적하고 허전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때때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혼자 있는 게 더 좋을 거라며 약간의 기대도 해 본 게 사실이지만,
지금의 현실은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논문도 몇 단어 진척을 보지 못한 채
덧없는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이런 얘기는 평생 안 하고 살 줄 알았는데
이제 정말 아내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
논문 빨리 쓰고 놀자고 옆에서 잔소리를 해 줘야
논문을 한 장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고
밥 한 공기에 별다른 찬이 없어도
그냥 집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까닭은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없어도
숨 쉬고 밥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기야 하지만
아내가 필요하고 가족이 꼭 필요하다는 걸,
뭘 가지고 어떻게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절묘하게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구속임을 느낍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꼭 함께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감사가 정작 얼마나 오래 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막상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되면
이 감사의 내용을 죄다 잊어버리는 일이 반드시 생기고 말지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누구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좋다고 같이 살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니
참으로 놀라운 분입니다.
 
원래 사랑이란 게 그런 건가 봅니다.
좋은 걸 좋다고 하는 건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좋지 않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
 
따라서 사랑은 창조의 질서를 벗어난
이 형편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하나님은 이 사랑을 참으로 선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저 같은 놈한테서
이렇게 아내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사랑의 선물을 받은 아내여.
남편이 좀 부족해도 짜증 내지 말고 어서 돌아오시오.
 
(2000년 여름 영국 카디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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