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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by 최승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8)


하나님의 부르심에 담백하게 응답하며 나아오는 이사야의 멋진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앞뒤 맥락 없이 딱 이 구절만 반복해 되뇌곤 한다. 언제든지 주의 뜻을 전하기 위해 준비된 자로 살다 부르실 땐 언제든 당당히 나아가자며.. 아니 여하튼 막 나가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여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 6:1~4)


영광이 가득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 내가 득의양양하여 찾아간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계획 가운데 원하신 특정한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환상 가운데 임하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6:5)


반가움? 기쁨? 이사야는 오히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죄인이 하나님을 직접 뵈오면 죽는다’는 당시의 전형적 믿음에 기반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혹 너무도 뜬금없이 하나님과 마구 친한 척하고 있지 않은가? 실은 골백번 죽어 마땅한 사람이 준엄하신 하나님과 막상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6~7)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9~10)


그런데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흔한 상상과 사뭇 다르다. 사람 하나를 애써 선지자로 세워 놓고 기껏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이 강퍅한 사람들은 깨닫지도 못할 것이고 또 깨달아도 안 된다!’


오늘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며 나아오는 사람들이 힘써 전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혹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부족한 나의 임의적인 생각이지는 않은가? 실은 보내신 분이 계시지 않는데 괜히 혼자 들떠서 나오신 건 아닌가?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하였더니.. (이사야 6:11)


이사야는 자기 생각을 섞지 않고 의뢰인의 뜻에 철저히 집중한다.


..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6:11~13)


분노하시는 하나님 마음 깊은 곳에는 그래도..


주여!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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