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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15. 2019

지금은 멸종된 사랑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의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읽었다. 국내에는 작년에 처음 소개되었으나 터키에서는 역대 베스트셀러 2위에 오를 정도로 굉장한 사랑을 받는 작품이라고. 작가인 사바하틴 알리는 불행히도 이 작품을 남기고 얼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인 탄압을 받다가 망명과정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한살이었다.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느낌도 그렇지만 <닥터 지바고>나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매우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아름답지만 오늘날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런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내용이었으나 이토록 애틋하고 정열적이며 평생에 걸쳐 잊지 못할 사랑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랑 자체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대가 불안했던 탓이 큰 것 같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미래도 알 수 없었던 세계. 그 안에서 태어나는 마음들이 오늘날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마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멸종된 고대 생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메인이 되는 사랑 이야기도 좋았지만 작가의 인간심리와 내면을 파악하는 시각이 냉철해서 여러모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인간이란 어쩌면 이리도 보편적인지.



⭐️⭐️⭐️
주위에 사람이 절실했지만 그럴수록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p.10



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동안 함께 지내던 사람에게 재앙이 닥치고 그들이 난관에 빠진 걸 보면 마치 그런 재앙을 이미 물리친 것 같은 안도감이 들고,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 뻔한 재앙을 그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련한 그들을 동정하고 싶어진다. -p.14



이 회사 직원 대다수가 친인척 혈연 관계라는 걸 잘 아는 함디는 직원들에게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절대 자기에게 대들 용기를 내지 못할 거란 걸 아는 라이프 에펜디에게는 이렇게나 못살게 굴었고, 그저 몇 시간 늦은 번역물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온 건물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쳤다. 쉽게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동류인 누군가에게 힘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만큼 달콤한 도취감이 어디 또 있겠는가? 게다가 남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계산하고 특정한 몇몇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기회가 생기면 더더욱 그러하다. -p.24-25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이 힘든 걸 시작하느니 차라리 장님처럼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서로 부딪칠 때만 상대방의 존재를 지각하는 쪽을 택하곤 한다. -p.47



사람들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가 감춰둔 영혼, 질서정연하든 뒤죽박죽이든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고 가장 단순해 보이는 사람도 경이로운 내면을 품고 있을 수 있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고뇌에 찬 영혼의 소유자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미적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는 듯 사람이라는 피조물을 이해하고 판단 내리는 걸까? 왜 우리는 처음 본 치즈의 특성을 말할 때는 주저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단박에 결론짓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걸까? -p.57-58



내가 당신을, 그러니까 세상 남자들을 왜 증오하는지 알아요? 당신들은 너무 많은 걸 요구해요. 마치 그래도 되는 권리를 타고나기라도 한 것처럼.... 내 말 명심해요. 말로 드러나는 요구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남자들의 그런 눈길, 그런 웃음, 손을 드는 모습, 간단히 말해서 여자를 대하는 모든 태도들.... 자기들이 스스로 얼마나 과신하고 얼마나 멍청한 짓들을 하는지 남자들만 모르는 것 같아요. 여자한테 접근하다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찌나 황당해 하는지, 그것만 봐도 남자들의 오만한 우월감이 드러나는 거지요. 자기네는 항상 사냥꾼이고, 우린 그냥 불쌍한 사냥감일 뿐이죠. 우리 의무는 늘 굽실거리고 순종하고 남자들이 바라는 걸 주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도 그래선 안 돼요. 손톱만큼도 거저 줘선 안 돼요. 남자들의 오만불손한 자만에 맞서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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