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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Nov 18. 2018

한 여자가 모든 것을 버린 이유

<슬픈 짐승>을 읽고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읽었다. 남편과 딸이 있는 한 여자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시간이 흐른 뒤 남자는 여자를 떠나고, 여자는 오래도록 홀로 남아 그 남자를 기다린다. 줄거리만 들으면 흔해 빠진 신파나 치정 소설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보고 싶었던 것은 남편과 딸을 버리고 떠날만큼의 강렬한, 그리고 사랑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고 일방적으로 계속되는 사랑이 어떻게 그려졌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막상 읽어보니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책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전혀 강렬하지 않다. 오히려 상당히 무미건조하고 평범한(?) 불륜에 더 가깝다. 상대 남자는 (흔히 중년 여성이면 연하의 다정한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과 다르게) 주인공보다 몇 살 많으며, 대단한 미남도 아니고, 그다지 로맨틱하거나 다정하지도 않다. 둘 사이의 감정적인 교감 또한 주인공의 착각과는 다르게 그렇게까지 깊지 않다. 여자는 남자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며 그와 관련한 아주 사소한 기억까지 낱낱이 끄집어내지만 그런 절절함 또한 실은 외부보다는 내부로 침잠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탐구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자로 하여금 가족을 버리고 남자를 선택하도록, 그리고 몇십년간 기다리도록 만들었는가.

주인공 ‘나’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그녀의 회상을 통해 전개된다. 현재 여자는 몇살인지도 정확히 모를만큼 나이를 먹었고, 이제는 눈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노인이 되어서까지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 감각이 애매해진 여자는 남자와의 처음 만남부터 관계가 깊어진 이후까지의 기억을, 그리고 드문드문 어린 시절과 그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순간을 이리 저리 오가며 떠올린다. 특이하게도 남편과 딸의 존재는 아예 지워져있다. 거의 언급도차 되지 않는다. 시대배경은 분단 시절 및 통일된 독일에 걸쳐져 있다.

시시껄렁한 사랑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집착하는 이유는 여자의 어린시절의 기억들로 조금씩 설명된다. 물론 자라면서 남들과 다르게 유난스럽거나 대단한 일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돌아왔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그런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방적으로 맞춰주는 어머니를 보며 무력함을 느꼈고, 사랑에 회의감을 느꼈고, 남편과 관성적으로 결혼했고, 어느날 심장발작으로 쓰러졌고, 인생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자신이 지금껏 모든 것을 내던질 정도로 뛰어들지 않은 것은 사랑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뭐 그런 것이다. 읽다보면 여자가 가족을 떠나게 만들었던 그 남자 자체가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여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어떠한 형태로든 무언가 사랑 비슷한 존재가 다가오기를,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렬했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덧없게 묘사되는 사랑, 그리고 집착, 시대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내내 감도는, 참으로 슬프고 쓸쓸한 이야기였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과 분단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분단으로 인해 생겨나는 직간접적인 영향들. 아주 사소한 어린시절의 기억이나 느낌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에 대한.

말미에 모든 사랑은 비극적이거나 권태롭다는 이야기에서는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가 떠올랐다. 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남자가 그녀를 떠난 이유, 그리고 그녀가 끝까지 남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나온다. 슬픈 ‘짐승’이라는 제목의 의미도.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p.24-25

“전쟁이 없다면 남자들도 여자들과 똑같이 그저 인간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용기와 기사의 충성심같이 남자들의 것으로 간주되는 일정한 특성들이 오직 전쟁을 통해 규정되고 미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남자들을 말살시킴으로써 그들을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남자들은 그렇게 끔찍한 행위들을 저질러도 여자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되었고 자신들에게 있어서 군인다운 특성들이 최고의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p.59

“프란츠에 대한 내 감정의 억제할 수 없는 성질이 공룡성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 내 안에 있는 공룡성, 원시적인 어떤 것, 격세유전의 폭력성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언어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도 프란츠에 대한 내 사랑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었다.” -p.107-108

“그것은 오히려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만성적 포기 이전의 시절, 모든 이상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시절, 보통의 출세와 보통의 결혼에 대한 기대가 아직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던 시절,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꼭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시작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p.116

“내가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많지 않아.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야. 어떨 것 같니? 너는 비극적인 쪽으로 결정했니?
너는?
어떤 쪽도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지. 비극적으로도 진부하게도, 그냥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만 결정했어.” -p.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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