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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Nov 30. 2018

진실은 친절하지 않아

<연애의 기억>을 읽고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록 ‘사랑’은 어떤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늘 꿈을 꾸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나보다. 그런 면에서 갓 연애를 시작한 이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기운을 나누어받는 것 같아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가 그토록 인기가 많은 것을 보면.

그러나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집중하는 이야기는 그토록 많은 반면에, “그후로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 사랑이 어떻게 식어가는지, 끝난 뒤의 모습이 어떠한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 사실 모든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끝나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이별’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은 어떤 사랑의 시작과 끝을 매우 담담하게 다루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19살에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테니스 클럽에 갔다가 자신의 엄마뻘인 48세의 여성과 짝을 이뤄 복식경기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19세의 남성과 48세의 여성. 게다가 여성에게는 남편과 두 딸(심지어 주인공보다 나이가 많은)까지 있었으니 둘의 사랑이 순탄할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어찌 어찌 사랑의 도피까지 해서 집을 얻어 함께 살게 되는데.

웬만한 로맨스 영화의 엔딩으로 적절할 법한 장면 이후에도 이야기는 한참 이어진다. 반짝거리던 욕망과 애정이 어떻게 바래가는지, 감정이 어떻게 식어가는지, 그로 인해 두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등이 주인공의 ‘기억’에 근거하여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는데, 읽으면서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 떠올랐다. <슬픈 짐승> 역시 사랑의 시작과 끝, 끝난 이후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여기서는 화자가 여성이지만. 두 소설 다 매우 적나라하고, 그런 면에서 사랑의 진실에 상당히 근접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환상을 박살내어버리는 이야기들이기도 하지만, 책 속에서 나오는 말처럼 진실은 원래 친절하지 않은 법이므로.

문체가 건조해서 지루하다는 평이 많았지만 예상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확실히 연애를 매우 건조하게 다룬 이야기이기는 해도,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뜨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은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읽자마자 속으로 당연히 덜 하고 덜 괴로워하는 거지, 하고 생각했는데, 다른 것보다도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 왠지 조금 슬펐다.

우리 대부분은 할 이야기가 단 하나밖에 없다. 우리 삶에서 오직 한 가지 일만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로 바꾸어놓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최종적으로 이야기 할 가치가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이건 내 이야기다. -p.14

내 생각에, 기억에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있고, 이것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우리가 기억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하다. 따라서 행복한 축이 속하는 기억이 먼저 표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따르는 작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단지 추측일 뿐이다. -p.39

나는 친절한 건 안해, 폴. 진실은 친절하지 않아. 인생이 시작되면 금방 알게 될거야. -p.212

“나는 (너희가) 함께 달아날 때 배짱이 있다고 말했어. 너희 둘이 말이야. 너희는 배짱이 있었고, 너희는 사랑이 있었어. 만일 인생에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인생은 어떻게 해도 너에게 만족스러울 수 없어.” -p.213

사춘기 소년 시절 그는 더 복잡한 것을 갈망했다. 그리고 인생은 그가 그런 것을 발견하는 걸 허락했다. 가끔, 그는 삶의 복잡함은 겪을 만큼 겪어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p.298

여전히 그 안에 있다고. 늘 그 안에 있을 거야. 아니, 그 말 그대로는 아니지. 하지만 네 마음에서는 그래. 어떤 것도 끝나지 않아. 그렇게 깊이 들어간 거라면 끝나지 않아. 너는 늘 상처입은 채 돌아다닐 거야. 그게 유일한 선택지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상처 입은 채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죽거나. 동의하지 않아?” -p.317

“내 의견으로는, 모든 사랑은, 행복하든 불행하든; 일단 거기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게 되면 진짜 재난이 된다.” 그래, 그것은 여기 그대로 남아 있을 자격이 있었다. 그는 “행복하든 불행하든”이라는 적절한 삽입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었다. “일단 거기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게 되면.” 겉보기와는 달리 이것은 비관적이지도 않았고, 달콤씁쓸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사랑의 최대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이 말한 사랑에 관한 진실이었으며, 여기에는 삶의 슬픔이 모조리 담겨 있는 것 같았다.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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