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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0. 2022

[M :신과 악마의 내기] #1. 행운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신이 있다. 어떤 이는 교회를 다니고, 어떤 이는 절을 다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 대신 과학기술을 종교로 믿기도 했다. 각자의 소망을 신에게 빌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들과 율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율 역시 신을 믿는 어머니 밑에서 자연스레 그의 신 하나님을 믿었다. 거창한 믿음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남들 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한 번쯤 교회에 나갔고, 그의 삶에 어려움이라는 상황이 닥치면 기도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율의 가족은 부유하지 못했다. 어릴 적엔 부모님이 운영하던 가게가 망해 자신의 가게 앞에 주저앉아 고개를 파묻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았고, 난방이 되지 않는 집에서 겨울 점퍼에 두꺼운 이불을 두 겹으로 덮어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잠들기도 했다. 율이 커갈수록 집의 형편은 나아졌지만 말 그대로 전보다 나아진 것뿐이었지 남들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율의 부모님은 율에게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당장 밀린 월세를 내는 대신 율을 학원에 보냈고,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지만 아들의 수학여행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냈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삶을 살았을지 모르나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많이 받았다 율은 늘 자부했다.   

율이 20살이 되던 해, 가족은 첫 번째 집을 가질 수 있었다. 낡은 복도식 아파트. 나이가 지긋이 든 경비아저씨가 경비실 안에서 항상 졸고 있는 곳. 방음이 되지 않는 탓에 옆집이 몇 시에 들어와 언제 샤워를 하는지 알 수 있는 그런 집이었지만 가족은 더없이 행복했다. 처음으로 생긴 집이 좋아서, 이제는 한결 편해진 자신들의 삶 때문이라는 이유보다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더욱 컸다. 좋은 일은 겹쳐 온다 했던가. 가족이 이사하던 그날 율의 대학 합격 소식까지 들려왔다. 모든 것이 잘 풀렸다. 항상 율의 가족에게 무정했던 그의 신이 20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봐준 느낌이었다.             

이런 행운을 축하할 겸 가족은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집이 생긴 것과, 율이 성인이 된 것, 대학에 합격한 것 모두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충분히 행복했다. 비싼 음식도, 고급스러운 술도, 멋진 장소도 아니었지만, 율에게는 이곳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고작 세 명이었지만, 율의 가족은 그곳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이 생긴 것도 축하할 겸 본가에 내려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겠다던 부모님은 빗길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하던 옆 차량과 사고가 났고, 손써볼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율에게 그 소식을 전하던 경찰관의 낮은 음성보다도 더 낮은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리가 풀렸다. 고작 하루 전에 모든 것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고, 이제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고 말하는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정한 그의 신이 처음으로 바라봐주었다는 생각을 한 자신이 한심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신에 대한 분노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즉시 교회로 달려가 십자가를 떼어 숴버리고 싶었지만 율에게 그보다 더욱 급한 것은 상을 치르는 것이었다.              

         

율에게는 고모네 가족을 빼면 친척이 없었다. 다행히 고모 가족은 바쁜 율의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율을 키워주고, 재워주며 늘 도움을 주는 부모 같은 존재였다. 고모의 아들들은 가족이 없는 율의 형과 동생으로 항상 함께했다. 그런 고모 가족의 도움으로 율은 한 번도 치러보지 못한 상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상중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율이 상을 끝낸 후 끝내 쓰러지자 그를 보살핀 것도 모두 고모 가족이었다. 율이 정신을 차려갈 때쯤 고모는 어렵게 율에게 말을 꺼냈다.

“힘들겠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많이 망설이고, 자신을 위해 한 말인 줄은 알았지만, 그 말이 부모님의 죽음을 더욱 확실시하는 것 같아 다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고모는 작정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너 혼자 살기에는 넓게 느껴질 집이야. 하루였지만, 가족들과의 추억도 있어 더욱 힘들지도 몰라. 그러니 집을 팔고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살아. 그 돈은 앞으로 네 학비와 생활금으로 쓰고.”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형제도 없고, 가뜩이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율에게 크진 않지만 그래도 방이 세 개나 딸린 집에서 혼자 지낸다는 것은 그 외로움을 더욱 커지게 만들 뿐이었다. 모아둔 돈 역시 없었기에 당장 혼자 생활비를 벌어 생활해 나간다는 것 또한 학교를 다녀야 하는 율에게는 어려운 일이 분명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율은 이내 고모에게 대답했다.

“집은 팔지 않겠습니다.”

“감성적으로 말고 이성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볼게요. 그러고 싶어요 고모.”

작정하고 말을 꺼낸 고모였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낼 순 없었다. 율의 생각이 확신에 차있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저 그것이 율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율이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 입학을 앞둔 하루 전날까지도 율은 얼빠진 사람처럼 지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율의 옆에는 고모의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최용주, 20살이 된 율과는 같은 나이였지만, 생일이 빨라 율이 형이라고 부르는 사이였다. 말이 형이었지, 20년 된 친구나 다름없었다. 용주는 자신이 나서 율의 옆에 있겠노라 했고, 율이 집을 팔지 않는다는 것을 고모에게 이야기했을 때 고모가 조건으로 건 것이 바로 용주와의 동거였다. 용주는 그런 율을 몇 달간 보살폈고 율은 말은 안 해도, 용주에게 많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정신 좀 차려. 학교는 가야 될 거 아냐”

듣는 둥 마는 둥 율은 그저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런 율의 등에 대고 용주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의 대학 입학 소식을 가장 먼저 누가 축하해줬는지, 그리고 가장 크게 기뻐하신 분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봐”

말을 마친 용주가 잠시 율의 등을 보다가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율의 등은 들썩이고 있었고, 율이 베고 누운 베개는 어느새 눈물로 젖어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용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율이 아침을 해놓고 자신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볼품없지만 해둔 달걀말이가 조금은 대견했다. 율은 애써 밝은 척하며 용주에게 자신이 한 음식을 먹어보라며 자리에 앉혔다. 밥을 먹으면서도 용주는 그런 율이 고마워, 안쓰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율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는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이미 두 사람은 충분히 많은 말을, 그동안 하지 못한 많은 말을 나눈 것만 같았다.     


이후 율은 조금씩 나아졌다. 학교를 다니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같이 소개팅에 나가고, 자신과 만나보지 않겠냐며 말한 여자들을 애써 외면한 채 학교와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만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그래야만 그에게 닥친 좋지 않은 상황들을 잊을 수 있었다. 잠시라도 감적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거나, 다시 우울해진다면 율은 밖으로 나가 닥치는대로 했다. 그것이 율이 오래도록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군대도 무사히 다녀왔고, 대학도 졸업했다. 1년이라는 오랜 기간 준비해 그래도 괜찮은 회사에도 취직할 수 있었다. 율은 성장했지만, 그의 집과 옆에 용주가 있는 것은 여전했고, 한 가지 더, 그리움 역시 여전했다. 특히나 가족의 집이 생긴 것을 축하한, 자신의 대학 합격과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 장소인 집 앞 작은 술집을 지날 때면 그 그리움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율은 항상 그 작은 술집을 피하기 위해 멀리 아파트 후문까지 걸어 들어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술집에서 운명처럼 그녀를 만나게 될지 율은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율의 그리움이 있는 술집이었다. 항상 그곳을 돌아 멀리 후문으로 집에 가지만, 그날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직장 상사의 쓴소리가 율의 마음을 종일 어지럽혀 두었고, 하루 종일 밖으로 뛰어다닌 탓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너무나 힘든 하루였다. 그 길에 그 술집이 있었다.

'들어가 볼까...'

율은 어떤 생각이었는지, 단지 몸이 힘들어서, 그래서 그리움 속에 묻히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6년 만에 처음 들어온 술집은 여전했다. 다만 바뀐 것이라고는 TV가 조금 더 큰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였다. 술집에 들어온 율에게 나이가 지긋한 남자 사장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혼자입니다.”

사장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율을 자리로 안내했고, 곧 메뉴판을 가져다주겠노라 말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율이 앉은자리는 율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앉았던 자리였다. 그리움이라는 바람이 더욱 세차게 율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가게 안은 한산 했다.          

곧 율에게 메뉴판을 건네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아닌 젊은 여자였다. 율의 나이대로 보였고, 큰 키에 뒤로 묶은 머리가 그녀의 수수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메뉴판을 주고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율이 이내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 역시 6년 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사실 율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니, 그날 이후 마실 수 없었다. 부모님은 맥주나 소주보다도 막걸리를 좋아하셨는데, 율에게 처음 술을 가르쳐 주던 날에도 막걸리로 술을 가르쳐주셨다. 율은 그때와 같이 막걸리 한 병과 전을 시키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나무의자 나무 식탁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고 막걸리를 잔에 부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율이었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 마시는 술이었기에, 쉽게 입에 대지 못했다. 술을 마시면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히 떠오를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율은 결국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한 채 멍하니 가게 안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시 종업원이 눈에 띄었다. 아까보다 자세히, 그리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리를 묶은 채 청바지를 입고 앞치마를 한 그녀의 모습은 볼수록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 종업원이 뒤를 돌아 율과 눈마주쳤다. 당황한 나머지 율은 도망치듯 계산을 하고 술집에서 나왔다.                


율이 제일 싫어하는 시간은 아침이었다. 인생에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에게 출근까지 겹친다면 정말이지 우울한 감정이 들어서 참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율의 머릿속에는 온통 어제 가게에서 본 여자 생각뿐이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이제는 잊을 수가 없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정신이 팔려 일에 실수가 잦아 상사에게 쓴소리를 들었지만, 그마저도 율의 신경을 쓰이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강렬한 존재였다. 집에 돌아오며 율은 아파트 후문으로 가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눈앞에 작은 술집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망설였다. 들어가 봤자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할 것이 분명했고, 어제처럼 눈을 마주쳐 당황해하며 가게를 빠져나오는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머리는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조심스레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간 율의 눈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와 같이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지만 율에게는 새롭게 아름다웠다. 종업원은 율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몇 분이세요?”

“혼자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종업원은 율에게 어제 앉은 그 자리로 안내해주며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어제와 같은 메뉴와 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녀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뭐라고 “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음식은 몇 번 입에 가져갔지만, 결국 오늘도 술을 마시지는 못했다. 그저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에 혼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가게를 나섰다.         

그녀는 율에게 희망이었다. 그리움에 묻힌 자신의 인생을, 아무 가치도 없는 것 같은 자신의 인생에 작은 가치를 부여해 준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율은 매일 그 술집에 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메뉴를 시켰다.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말도, 술을 입에 대지 못 하는 결과도 같았지만, 율에게는 그 상황이 희망이자 삶의 낙이 되었다. 특히나 다음날 출근하지 않는 금요일에는 조금 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희망에 차 오늘도 작은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율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그녀가 아닌 남자 사장이었다. 가게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가게를 둘러보고 있는 율에게 사장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은 하린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하린’

그녀의 모습만큼이나 예쁜 이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해진 율은 서둘러 늘 앉던 자리에 앉아 항상 주문하던 메뉴를 시켰다. 익숙한 전과 막걸리가 나왔다. 항상 막걸리를 잔에 따르기까지였다. 율은 두 달을 넘게 가게에 오면서도 아직까지 술을 마시지 못했다. 익숙한 듯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려던 찰나, 맞은편에 한 여자가 앉았다. 그녀였다. 늘 입던 옷이 아니었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의 치마를 입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그녀는 자칫하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옷차림을 하고 나왔다. 진하지 않은 화장과, 머리를 풀어도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옅은 미소는 율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하린, 26살. 현재 취업 준비생.”

‘네? “

적잖이 당황한 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자신에게 하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메뉴판을 주는 것이 전부인 그녀였기에 이런 당당한 모습은 율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 이름, ‘이하린’이라고요. 26살”

말을 마친 그녀는 술병을 들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냐는 그녀의 말에 율이 술잔을 들고 술을 받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잔을 들고 기다리는 그녀를 보며 율도 술을 따라주었다. 부모님에게 술을 따라드린 후 처음이었다.

“짠해요.”

얼떨결에 잔을 받고, 건배까지 하긴 했지만, 율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쭈뼛쭈뼛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였다. 다른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그를 안내한 것은 사장님이었지만 곧 메뉴판을 들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눈이 가는 얼굴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눈이 갔다. 순하게 생겼지만, 그 속에서 잘생긴 그의 얼굴이 좋았고, 조금은 두꺼운 입술이 좋았다. 하지만 가장 눈이 갔던 것은 그리움이 많아 보이는 그의 눈이었다. 겉모습은 밝았지만, 그의 눈만큼은 우수에 젖어있었다. 그렇게 그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당황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에게 무언가 말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이게 마지막 만남이겠다 싶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는 매일 가게를 찾았다. 그의 눈은 항상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늘 잔에 막걸리를 따랐지만, 입에 대는 것은 실패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는 꾸준히 가게에 왔다. 그가 가게를 떠난 후 자리에는 늘 반 정도 먹은 전과 함께 잔에 따라두기만 한 술이 있었다. 그에게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분위기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야근을 했을 수도, 일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저 그를 다시 보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뿐이었다. 애틋했다. 그의 이름 한 글자 알지 못하지만,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의 그리움이 이제 다른 의미로 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다행히 다음 날 그는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나타났고, 나는 그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안도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사장님에게 내일은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하린은 마시려던 술잔을 내려놓고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나라고 여기 앉아 그쪽한테 말 거는 거 굉장히 어렵거든요?”

율이 차마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어나갔다.

“적어도 사람이 어? 나이, 이름, 직업 말했으면 그쪽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린의 당당함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 율을 피식 웃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하린 역시 처음 본 그의 웃는 얼굴에 감추고 있던 긴장을 풀었다.

“이 율, 26살, 회사원입니다.”

같은 나이의 사람일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동갑인 나이의 율이 조금은 신기했다.

“보려고 본 건 아니지만, 늘 술을 못 마시던데 이유가 있어요?”

그날 이후로 용주에게조차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같이 술을 마신 적은 더욱이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라면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동안 가장 행복했고, 가장 슬펐던 곳이 여기여서. 그 뒤로 그때와 같은 행복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때와 같은 슬픔은 항상 함께여서. 그래서..”

말끝을 흐린 율이었지만,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하린이었다. 명랑한 성격의 하린조차도 그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잠깐의 정적 후 율이 말을 이어나갔다.

“제 부모님은 그렇게 20살이었던 저에게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슬픔을 주고 가셨습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그의 사정을 알 것 같았다. 하린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항상 쾌활하고 명랑하여 눈물 없는 하린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난 눈물에 당황해 얼른 얼굴을 닦으며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여자친구 있어요?”

아까부터 율을 적잖이 당황시키는 하린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율은 멀뚱멀뚱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없으면 나 만나볼래요?”

술집 안으로 적당히 따스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빨리 일어나 밥 먹어! 회사 늦겠다!”

율은 다그치는 하린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린은 이제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와 율이 덮은 이불을 휙 하고 걷어냈다. 율은 더듬더듬 이불을 찾으며 말했다.

“5분만.”

5분 만이라는 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하린은 율을 일으키기 위해 침대에 올라갔다. 그때 율이 하린의 목 뒤에 손을 넣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냥 회사 그만두고 커피나 팔고 책이나 쓰며 살자.”

“카페 차릴 돈은 있고?”

말을 마친 하린이 일어났고 마지못해 율도 뒤따라 일어났다. 율은 책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하린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낙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해 쓰는 글은 아니었기에 출판을 해볼 생각은 없었지만, 하린을 만나고부터 더욱 책의 출판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둘이 같은 집에 살게 된 것은 채 6개월이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작은 술집에서 받은 당당하고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하린의 고백이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너무나도 그때와 비슷한 행복이어서, 그래서 또 사라질까 봐. 한참을 망설이던 율이 하린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당황한 기색도 잠시 하린은 율에게 기어코 핸드폰 번호를 받아 갔다. 하린은 시도 때도 없이 율에게 연락했다. 밥은 먹었는지, 최근에 본 영화는 무엇인지, 취미가 무엇인지. 너무도 자주 오는 하린의 연락에 회사에서 몇 번 주의를 듣기도 했지만 율은 그저 행복했다. 하린의 앞에선 무뚝뚝한 율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떤 아이보다도 해맑게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린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율을 자신이 일하는 술집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율에게 말했다.

“정말 마지막. 이제 더 묻지 않으려고요. 나랑 만날래요?”

그 말에는 힘이 있었고, 진심과 아쉬움, 슬픔도 같이 담겨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의 말을 거절한다면 이제는 정말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그런 율을 보던 하린이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됐다는 말과 함께. 율의 심박수가 빨라졌다. 정말 그녀를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 율은 6년간 한 번도 찾지 않은, 그의 신 ‘하나님’에게 물었다.

'이번엔 정말 내 말에 관심 없던, 내 행복을 무참히 가져가 버린 당신이 미안함에 주는 선물이라면, 그렇다면 한 번만 더 받아볼게요. 행복.'

말을 마치자마자 가게 밖으로 달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그녀를 자신의 앞에 세웠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며 하린에게 말했다.

“내가 가진 행복은 좋지 않은 결말이었어요. 항상. 그래도 내 행복이 되어줄 수 있어요?”

대답 대신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하린과 율의 입술이 부딪혔다. 율의 두 번째 행복이었다.               

그리웠던 만큼, 그 사랑이 너무 컸던 만큼 둘의 관계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둘의 모든 것을 가졌고, 그럼에도 계속 가지고 싶었다. 몸뿐만 아니었다. 하린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알아갔다. 하린 역시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녀에게서도 그리움이 느껴졌다. 율처럼 일가친척이 있는 것도 아닌 정말 혼자인 하린이었다. 어릴 적에는 고아원에서 살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혼자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전단지, 인형탈, 카페 아르바이트까지. 마지막으로 일하던 곳이 바로 율을 만난 가게였다. 그녀는 낮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저녁에는 생활비를 위해 일을 했다. 어쩌면 율 자신보다 더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밝게 웃고 있었다.     

하린을 만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율은 하린을 용주에게 소개했다. 그만큼 하린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있었다. 용주는 그런 율을 보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6개월쯤 되었을 땐 아예 고모 집으로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 그곳에서 모두가 놀랄 말을 꺼냈다.

“같이 살겠습니다.”

고모와 고모부가 밥을 먹던 중 사레가 들려 대답을 못했다. 용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고, 용주의 동생 재호는 그저 율과 하린의 얼굴을 멍하니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너무 급한 것 아니냐며 만류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반대할 순 없었다. 율의 웃는 모습을 6년 만에 보는 그들이었기에. 그런 마음을 아는지 용주가 거들었다.

“그래도 너무 하는 거 아니냐. 나 6년 동안 부려먹고, 여자 친구 생기니까 바로 나가라니.”

물론 서운함은 있는 용주였다. 하지만 서운함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율도 용주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말은 안 해도 언제나 용주에게 고마워했고, 친형보다도 더 잘 따르던 율이었으니까.

"그럼 언제부터 같이 살 계획인데?"

"내일부터요."

한 발 양보해 물어본 고모의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사실 고모와 고모부에게 허락받을 필요나, 강제성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율에게 가족이자 부모 그 이상인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둘은 율의 집에서, 율의 부모님과의 행복한 기억이 있는 집에서 행복한 시작을 할 수 있었다.     

하린과 사는 건 생각보다 훨씬 행복했다.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밥을 먹으며, 퇴근 후에는 서로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린이 율의 집에 들어오고 난 후부터 율은 하린에게 가게를 그만두라고 말했다. 그저 하고 싶은 공부에만 집중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율의 벌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집이 있는 율에게 나갈 돈은 적었다. 율과 하린 둘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하린은 아무 대가도 없이 얹혀살고 싶지는 않다며 일을 계속했다. 그런 하린과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이긴 것은 율이었다. 그 덕에 하린은 편하게 집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미안한 마음에 항상 율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주말이면 하린과 율은 교회에 나갔다. 우연인지 하린 역시 어릴 때 기독교 고아원에 다녀 신을 믿고 있었다. 둘은 항상 아침 일찍 예배를 다녀온 후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녔다. 거리가 조금 멀어지면 토요일에 여행을 가 일요일에 그 마을에 있는 교회에 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재미였다. 아니, 그저 하린과 함께라면 모든 순간이 율에게는 축복이고, 행복이었다. 하린 덕분에 매 순간이 귀했다. 하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율의 퇴근시간이면 항상 역 앞에 나와 율을 맞아주었다. 혹시라도 밤길 위험할까 봐 나오지 말라는 율의 말은 들은 척도 않더니 하루도 빠짐없이 율을 데리러 나왔다. 한 번은 비가 와 우산을 가지고 나와 달라는 율의 말에 하린이 우산 없이 비를 쫄딱 맞은 채 율을 데리러 왔다. 깜짝 놀란 율이 하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하린은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비 맞으면서 가자 우리!”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엽고 좋아서 그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당장 내일 입어야 하는 정장보다 같이 비를 맞고 싶다는 하린이 그에게는 더 소중했다. 우산이 없어 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둘은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하린은 꽃을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율이 퇴근길에 천 원짜리 장미 한 송이를 사 그녀에게 줄 때면 빨갛게 상기된 볼로 장미를 가져갔다. 그런 하린의 모습이 귀여워 내 얼굴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고 구박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율의 품 안에 안기는 하린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려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너무 사랑스러운 하린이었다. 율이 한동안 꽃을 사다 주지 않으면 조금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요즘은 꽃 안 펴?"라고 말하는 하린의 모습에 일부러 꽃을 등에 숨겨가기도 했다. 그녀가 등 뒤에 숨긴 꽃을 발견하고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을 때면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것만 같았다.               

하린을 만나고 2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율은 오랜만에 만난 용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제 더 못 기다리겠어. 결혼할래.”

사실 율은 같이 사는 순간부터 하린과 결혼하겠노라고 용주와 그의 가족들에게 떠들고 다녔다. 같이 사는 건 허락해주겠지만, 결혼은 아직 안 된다며 극구 만류하던 고모 가족 때문에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항상 그의 편이던 용주도 결혼에 대해서는 반대했고 조금은 더 하린에 대해 알게 되면 그때 하자고 율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것도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율에게 있어서 그 시간들은 하린에 대해서 알기에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넘쳤다. 하린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없는 여자였다. 말을 마친 용주가 조용히 율을 쳐다봤다. 좋기도,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결국 본인의 선택이었다. 둘이 함께 크던 8살 꼬마들이 아닌, 28살 성인이었다. 율의 결정을 말릴 수도,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가 행복하길 바랄 수밖에.              

예상외로 고모의 반응은 덤덤했다. 마치 이런 날이 곧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사실 고모 역시 율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율을 웃게 해 준 하린이 종종 자신의 집에 와서 가족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서 하린이도 승낙한 거야?”

그제야 율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아직 하린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다. 함께 살며 당연히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이였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그 시기가 지금은 아닐 수도 있었다. 의견은커녕 청혼조차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율에게 용주는 웃기다는 듯 순서가 바뀌었다며 청혼부터 하고 오라는 말을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갔다.               

고모 집에서 나와 바로 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린아 어디야 지금?”     

“나 집이지. 무슨 일 있어?”

티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역시 하린은 율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당황한 목소리로 비가 와서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말하는 율에게 하린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지만, 조심히 오라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진즉에 반지는 준비해두었었다. 누가 봐도 티 나는 목소리로 하린의 반지 사이즈를 넌지시 물어본 적 있는 율이었고, 그런 하린은 커플링을 기대했지만 끝까지 주지 않는 율에게 조금 서운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율은 그날 결혼반지를 사두었고, 하린과 결혼할 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하린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반지는 늘 율의 정장 안주머니에 있었다. 이제 꽃다발만 있으면, 그녀가 율의 청혼을 받아만 준다면 더없이 완벽한 하루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차 문을 열던 율이 차 뒷좌석에서 우산을 꺼내 내리는 비를 뚫고 거리로 사라지더니 곧 꽃 한 다발을 사 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물망초였다.            

내리는 빗소리에 차 안에서 틀어 놓은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천둥소리를 동반한 비는 보란 듯이 율이 탄 자동차 앞 유리창을 거세게 때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시야 또한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멀찍이 뒤에서 따라오는 차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곧 속도를 올렸다. 도로에 규정된 속도만큼 올렸을 뿐이었지만, 날이 좋지 않은 탓에 차는 마치 100km를 훌쩍 넘는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조금 후면 그토록 사랑하는 하린과 함께 아침을 보내고, 저녁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율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달리는 와중에, 맞은편에서는 한 트럭이 오고 있었다. 트럭의 남자는 율과는 다른 의미로 조급했다. 저녁 늦게까지 계속된 배송 업무에 지칠 대로 지친 택배기사였고,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가서 10분이라도 더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빗길 속에서 계속해서 속도를 올려갔다. 마주 오고 있는 차가 있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무언가 크게 잘못이라도 된 것처럼 트럭은 율의 차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고, 율은 트럭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 곧 난간으로 추락했다. 트럭을 몰던 운전기사는 급하게 차를 정차하고, 난간으로 추락한 차와 율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았다. 곧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차에 올라 전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든 상황을 난간 밑으로 추락한 율이 반쯤 눈을 뜨고 보고 있었다. 외상은 심했지만 의식은 있었고, 지금 당장 병원에 갈 수 있다면 적어도 목숨을 건질 순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고를 낸 트럭 기사는 이미 자리에서 떠나갔다.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율은 그가 믿는 신 ‘하나님’에게 기도를 했다.

'왜 하필 지금이죠...'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신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때였다. 차 한 대가 사고 현장에 멈췄다. 차가 없는 도로였고, 사고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으면 보기 힘든 위치였다. 하지만 그 차는 정확히 사고 지점에서 멈추었다. 문득 율의 머릿속에 뒤따라오던 차가 한 대 있었다는 사실이 스쳐갔다. 율은 자신의 기도를 신이 들어주었다는 생각에 죽어가는 와중에 조금은 기뻤다. 아니 사실 많이 기뻤다. 아직 하린과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그의 기쁨에 있어 가장 큰 이유였다.             

사고 지점에서 멈춘 차주는 우산을 쓰고 내려 사고 현장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차주는 전화기를 들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오래도록, 사고를 낸 트럭 기사보다도 오래 율을 쳐다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많이 피를 흘려 의식이 흐릿해갈 때쯤 차주는 무심한 듯 등을 돌리더니, 차에 시동을 걸었다. 멀어져 가는 차 소리가 율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렇게 율은 아무도 없는 도로 옆 난간 밑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앞으로 사랑하는 하린의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한다는 것, 그녀와 같이 아침을 먹고, 저녁에 수다를 떨며 서로의 하루를 마무리할 수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슬펐고, 미안할 뿐이었다. 부모님도 빗길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더니, 자신도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니 퍽 슬펐다. 자신의 신 ‘하나님’에게 건네던 불평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저 하린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꽃을 들고 행복해하는 그녀의 얼굴이, 그녀 덕에 처음 율이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날, 완전히 취해버린 율을 부축해가며 웃기다는 표정의 그녀의 얼굴이, 아침에 율을 해맑게 깨우던 그 얼굴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보통 사람이 죽을 때 자신의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간다고 들었지만, 율에게는 자신의 인생보다도 소중했던 것이 하린이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지만 율은 곧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도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의 신 하나님. 덕분에 그녀를 만나 조금은 아니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하필 지금일까 하는 원망도 생기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그마저도 행복합니다. 하나님, 그동안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무심했다면 죽기 전 단 한 번이라도 내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원망이 나올 것 같던 율의 입에서 뜻밖의 기도가 나왔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율이 마저 말했다.

'하린이가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언젠가 꼭 다시 만날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을 채 끝내지 못한 채 율의 숨소리가 공중으로 사라졌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가 엎어진 차에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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