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지만 더없이 밝은 달이 어두운 거리에 포근히 빛을 내렸다. 빛을 받으니 거리의 건물들이 더욱 눈에 띄었다. 현대적이다 못해 세련된 건물이 서있는 곳. 그 사이로 옛 정취가 물씬 나는 한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거리의 바로 옆에는 조선의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궁까지 있으니, 이보다 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곳이 세상에 존재할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런 멋진 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바쁘다. 누군가는 사랑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이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런 사람들을 한 남자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거리에서도 높은 언덕에 위치한 한옥에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칫 아찔해 보이는 난간에 걸터앉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손에 쥔 포도주 한 병만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남자도 한때 저곳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거리를 거닐던 때가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고, 매일이 새로웠다.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기억하지 않기 위해 애쓸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져 남자의 머릿속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웃던 모습, 자신을 보며 행복해하던 얼굴이 더욱 선명해짐과 동시에 공허함도 비슷한 크기로 커져갔다.
“끝까지 너무하십니다.”
원망이라도 하듯 그의 신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100년이 지나도 그의 신은 여전히 그에게무정했다. 신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이라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그에게 무정한 신이었기에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아니, 하늘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신을 쳐다본다.
“참 한결같은 양반”
조금 전 했던 말과는 달리 남자의 말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그저 원망과 투정이 섞인 불평이었다. 말을 마친 남자는 시선을 하늘에서 땅으로 옮기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땅으로 몸을 내던진다. 그가 몸을 내던진 거리에는 여전히 보름달이 포근한 빛으로 어둠을 감싸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