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도로를 향해 퍼붓고 있었고, 율은 그 도로에 멍하니 서있었다. 조금 전까지 의식이 흐려지고 있던 율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혹시나 꿈을 꾼 건 아닐까 하며 넘어진 차를 보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쓸쓸하게 죽어있는 자신이 있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보던 율이 도로 위로 올라왔다. 여전히 도로에는 차 한 대 지나가고 있지 않았다. 죽으면 천사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저승사자라도 와서 무언가를 설명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죽은 게 점점 더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참, 율은 결심이나 한 듯 걷기 시작했다. 하린이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혹시 하린이라면 하는 기대가 있었다. 걸어가기에는 꽤 먼 거리였지만 지금의 율에게는 그런 것쯤 문제가 아니었다. 율이 도로를 향해 걸음을 내딛을 때 율의 가던 방향에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내리쳤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속해서 길을 가려고 했지만, 곧 그곳에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아니었다.
쭈뼛쭈뼛 율의 앞으로 걸어온 남자는 율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은 것도 놀라운데, 번개와 함께 나타난 사람을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싶었다. 율은 천천히 남자를 쳐다봤다. 키는 180이 넘어 보이는 큰 키였고, 얼굴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인상이었다. 그 외에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만 그의 몸에는 비가 닿지 않았다.
“이율, 28세, 사고사”
조금 전 미안하다는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얼굴과 저음으로 읊었다. 이제야 죽은 게 조금은 실감이 났다. 하지만 율의 이름을 말하고 나자,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 많은 얼굴이 되어 율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죽어보니 어때?”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그 여자는?”
그 여자가 하린을 말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아 말을 이어갔다.
“그게 가장 걱정입니다. 그나저나 당신은 누구죠?”
“나? 나 천사. 그것도 꽤 높은 사람.”
그는 말을 마친 후 자신의 이름을 ‘더그’라고 말했다. 더그라는 이름에 이상하리만치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린이를 보고 갈 수 있을까요?”
“안돼. 죽고 나서 바로 천국으로 올라가는 게 법이야. 그나마 내가 높은 사람이라 이렇게 앉아서 이곳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라고”
자신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더그는 스스로 약간은 으쓱대며 말했다. 야박했다. 조금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참 서러웠다. 얼마 이야기를 해보지 않았지만, 더그가 편하게 느껴져서일까. 율의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쳤다. 지금 자신이 도망갈 수 있다면. 많은 영화에서도 귀신으로 떠도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번개와 함께 온 더그를 피해 도망갈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는 거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만 알아둬.”
불쑥 나온 더그의 말에 놀라 율이 쳐다보았고, 더그는 멋대로 생각을 읽어 미안하지만 그게 자신의 의무이자 권리라며 말해주었다. 얼마 보지 못했지만, 지금껏 본 더그의 얼굴 중 가장 싸늘했다.
“이제 가자고.”
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앉아있던 율에게 말했다. 진짜 간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라는 생각보다는 하린의 생각이 더 컸다. 마지막까지도 보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더그는 어둡고 적막한, 빗소리만 나는 도로에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들었다. 따라오라는 더그의 말에 율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 발짝씩 옮겼다.
밝은 빛으로 된 문을 통과하느라 눈이 부셔 잠깐 감았다 떴다. 골목이었다. 율 자신이 생각한 천국과는 사뭇 달라서 의아했지만 이내 이곳이 자신이 알고 있는 서울의 한 골목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린이와 자주 오던 삼청동이었다. 사람 많은 대로변에서 약간 위쪽에 위치한 카페가 그들의 가장 좋아하는 카페였다. 4층 같은 2층에 나란히 앉아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평화로워지는 곳이었다. 더그는 그런 율의 마음을 아는지 율을 그 카페로 데리고 갔다. 가게 문은 닫혀있었다. 하지만 더그는 그런 것쯤 문제도 아니라는 듯 문을 통과해 카페 내부로 들어갔다. 율이 더그를 따라 들어가자 이내 익숙하고 편안한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늑했다. 불 꺼진 카페였지만, 하린이와 함께 한 기억들로 인해 마음만큼은 따뜻해졌다. 늘 2층에 올라가 나란히 앉으며,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게 바로 어제 일 같았다.
더그와 율이 2층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게 싫었는지 더그가 눈짓으로 가게 내부의 불을 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율이 늘 앉던 자리에 앉았고, 율도 그런 더그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이곳은 왜 온 거죠?”
“선물이야. 아까 말했듯이 바로 가야 하지만, 내가 조금 높은 사람이거든.”
율은 찡긋거리며 웃는 더그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신도 너에게 조금은 미안해하고 있고.”
신이 율에게 조금 미안해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의 율은 알지 못했다. 카페 안은 적막 했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어찌 보면 무단으로 침입한 곳이 시끌벅적할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나쁘지 않았다. 하린과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던 자리에 더그와 함께 앉아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더그였다.
“보통 사람들은 죽으면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묻는 게 참 많던데, 넌 그렇지 않은가 봐?”
그제야 율의 머릿속에 죽음 이후의 일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궁금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죽음 이후에 자신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이며, 어떻게 가는 것이고, 끝에는 신이 있느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뒤로한 채 율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신은 내 일생에 나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나요?”
진심이었다. 율의 인생에서 잠깐의 텀은 있었지만 신을 믿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신은 그의 작은 바람이나 행복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무관심해 그가 무엇을 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더그는 그런 율의 질문이 살짝은 어려운 건지, 대답하기 곤란한 건지 말을 돌렸다.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는 않아?”
더그가 말을 돌리고 있음을 뻔히 아는데도 율은 모르는 척 그의 질문에 반응해주었다. 그때부터 더그는 신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행히도 네가 믿던 신 ‘하나님’은 존재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있다고 확신한다며 늘 기도하지만, 인간인지라 그 속에 의심이 없을 수는 없어. 다들 죽으면 가장 그게 궁금하면서도 섣불리 묻지 못하더군.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여 지옥에 가게 될까 봐. 어떤 의미에서 너는 참 믿음이 좋은 편이야.”
우스웠다.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불평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하린을 만나기 전까지 교회 근처는 가지도 않았다. 그런 율에게 믿음이 좋다 하니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은 죽으면 크게 세 분류로 나뉘어. 첫 번째, 네가 믿는 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남보기에 큰 잘못 안 하며 그럭저럭 살아간 자, 신은 믿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간 자, 신을 믿던 믿지 않던 악하게 살아간 자. 첫 번째 경우 천사가 즉시 죽은 사람의 앞에 나타나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보통, 마지막의 경우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악마가 와서 당연히 지옥으로 데려가. 두 번째 경우가 조금 특이한데, 이 경우는 천사는 관여하지 않아. 즉 악마가 그 사람에게 찾아가 악마가 되어 자신과 같이 지옥으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일을 할지, 그저 귀신으로 남아 현세에 영원히 떠돌지, 그것도 아니면 지옥에서 느끼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그냥 ‘무’로 돌아갈지 선택하는 질문을 하게 되지.”
평소 율이 교회를 다닌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항상 듣는 질문이 있었다. 너희들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너희 신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게 된다면서 이 부분은 어떻게 입증할지 물어보곤 했다. 아무리 자신도 신에 대해 불평이 많았다지만, 결국 신을 믿는 사람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답하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교회에서 배워오던 것과 사람들의 질문이 같았으니까. 율은 조금 생각하더니 곧 더그에게 질문했다. 더그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일반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단지 신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요.”
더그는 예상했다는 듯, 그리고 이런 질문에 어느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좋든 싫든 사실은 이거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본래 천사들은 인간의 일에 상부 명령 없이는 관여할 수 없어. 상부에서도 거의 관여를 하지 않는 편이고. 그것이 좋은 의도였던, 나쁜 의도였던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딱 한 번 관여할 때가 있는데 그게 신에 대해 알려 줄 때야. 천사의 업무 중 하나인데, 모습을 바꾸어 길에서 하나님에 관한 전단지를 나눠줄 수도 있고, 지인을 통해 알려줄 수도 있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기회가 돌아가는 거지. 그리고 그것을 잡느냐 마느냐는 결국 인간의 선택인 거고.”
듣고 보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갔지만, 그래도 그 기회 한 번을 놓쳤다고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조금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자신이 들어왔던 것처럼 지옥에는 가지 않았지만, 악마가 되거나 귀신으로 남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가 되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율에게 더그는 한 가지 예를 들어주었다.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천국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는데, 죽었으니 '사실 천국은 있었으니 천국으로 갑시다' 하면 좀 이상하지 않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신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 점에 안도할 뿐이었다. 더그는 이제 가야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와 같이 문을 만들지 않고 말없이 삼청동 거리를 걸어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어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걷던 둘 사이에서 침묵을 깬 것은 율이었다.
“이번에는 왜 걸어가는 거죠?”
“근처거든. 그리고 네가 많은 추억을 가진 곳이잖아.”
더그의 배려였다. 하린을 끝내 보여주지 않은 더그였지만, 그게 그가 못되고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그의 말처럼 이곳은 하린과의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고즈넉한 삼청동 거리를 걸으며 같이 골동품 가게에서 쓸데없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고, 맛있는 저녁을 함께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모두 추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그는 걸음을 멈추고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더그를 따라 뒤따라 들어간 율이 이상한 점을 느꼈다. 하린과의 셀 수 없이 많은 추억을 만들 정도로 자주 오던 삼청동에 이런 골목은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골목이었다. 한옥과 세련된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삼청동 거리와는 대비되게 골목에는 낡고 허름한 4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바람에 날린 쓰레기만 날아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것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보는 곳이지?”
“네, 죽은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곳인가 보네요.”
더그가 웃기다는 듯 웃더니 율에게 말했다.
“네가 살아있을 때 넌 늘 이곳을 봤어. 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단지 기억에 없을 뿐이지. 볼 순 있지만 무관심하니까. 우리가 그렇게 설정해두었거든.”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더그가 들어간 곳은 골목 끝에 위치한 4층짜리 허름한 건물이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밖과 다르지 않았다. 건물의 내부도 허름했고, 사람이 없어도 한참은 없었던 것 같은 경비실과 엘리베이터 두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4층짜리 건물에 짝수층과 홀수층을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2대나 있는 것은 조금 의아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 옆에 적혀있는 B7층. 이 건물 밑에 지하 7층까지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놀랄 것은 없었다. 여기서 놀라면, 앞으로의 일에 있어 더 적응하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더그는 짝수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오더니 4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듣지 못했지만, 이제 이곳에서 떠난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잠시나마 잊고 있던 하린이 생각나 다시 가슴이 미어졌다. 그때 뒤쪽에서 두 남자가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한 남자는 키가 컸다. 키가 굉장히 크다고 느낀 더그와 비교해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몸은 호리호리했지만, 얼굴은 싸늘했다. 표정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지만, 무표정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싸늘함, 죽음. 비슷한 단어들을 모두 가져다 보아도 맞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더그가 그에 관해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지만, 율의 직감은 그 사람이 악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말해주었다. 율은 자신도 모르게 더그의 뒤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옆에 있는 남자는 싸늘함이 느껴지는 않았다. 다만 남자의 옆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더그의 옆에서 대화도 하며 편하게 있을 수 있던 율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그렇게 그 둘은 천천히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빌.”
더그가 활짝 웃으며 그, 아니 빌이라는 남자에게 말했다. 순간 율은 천사를 악마로 오해한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빌의 대답에서 오해는 금방 풀렸다. 빌은 정말 보기 싫은 사람을 보았다는 표정을 하고 빈정대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천사 나리.”
비꼬는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더그는 그런 빌이 진심으로 반가워 보였다. 더그는 여전히 웃으며 빌을 대하고 있었다.
“거친 말은 여전하네. 옆은 이번에 데려가는 사람인가?”
더그의 모습이 순간 슬퍼 보였다. 배가 무척 나온 그 남자는 빌이 지옥으로 데려가고 있는 사람인듯했다.
“그렇소. 요새 지옥으로 데려가야 하는 놈들이 뭐 이리 많은지.”
“그래도 죽음 이후에 대해 설명이라도 좀 해주지. 가는 길.”
“가서 불구덩이에 던져지거나 찔리고 또 찔리는 일일 텐데 얘기해줘서 뭐합니까.”
상대를 배려해서 말해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듣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았다. 빌이 데려가던 남자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게 보였다. 빌은 무심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더그와는 다른 엘리베이터였다. 각 엘리베이터에는 하나의 버튼만이 있었는데 위로 올라가는 버튼과 밑으로만 내려가는 버튼이었다. 빌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 자신을 뻔히 쳐다보던 율과 눈이 마주쳤다. 곧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빌이 너무나 섬뜩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율에게 돌렸다. 빌의 눈이 빨갛게 변했다.
“저거 ‘M’이오?”
더그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빌이 순식간에 율의 눈앞으로 매섭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검은 낫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율의 목을 잡으려 했다. 채 피할 틈도 없었다. 율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자리에 서서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었다. 잠시 후 굉음이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질끈 감은 눈을 서서히 뜨자 그곳에는 율과 빌의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창이 있었다. 당황한 빌이 창의 끝을 쳐다보았을 때 더그는 이미 상냥하게 웃으며 빌을 대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무표정으로 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위압감이 율에게 전달될 정도로 강력했다. 당황한 빌이 그제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내가 ‘M’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서...”
떨고 있었다. 더그가 자신이 꽤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던 것은 장난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싸늘해 보이고 죽음이 따라다니는 것 같은 빌 조차도 더그의 앞에선 한낱 호랑이 앞에 개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빌이 데려온 남자가 문을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운명을 한 문장으로, 그것도 최악의 운명을 들은 것도 부족해 방금 일어난 소란까지 봤으니, 아마 율 본인도 그 상황이었으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빌은 남자가 나간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더그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남자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망자를 놓치는 건 악마에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나?”
더그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는 많이 차분해졌지만, 여전히 목소리에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렇죠...”
말을 더듬으며 빌이 허공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곧 그 손에 도망간 남자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망간 남자의 목이 있었고, 빌은 한 팔로 남자의 목을 잡아 허공에 들었다.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빌은 율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돌진했다. 율에게 달려오던 그 속도와 비슷했다. 굉음이 난 엘리베이터 안을 살짝 쳐다본 율은 여전히 남자가 목을 잡힌 채 엘리베이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곧 문이 닫혔다. 잠깐의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더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떠올랐다. 신이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처음 본 빌이 율을 향해 ‘M’이라는 호칭을 쓰며 그렇게 무섭게 달려왔다는 점. 다른 모든 것보다도 그 두 가지가 가장 의문이었다. 하지만 율은 애써 다른 질문으로 침묵을 깼다.
“높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예요?”
더그는 그런 율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천사와 신 사이에 한 존재가 있어. 크게 이승 전체를 관리하는 천인장과 천국의 군대를 관리하는 천군장, 군대 외 천국의 천사들을 관리하는 천사장. 나는 거기서 천인장을 담당하고 있고. 몇몇 인간들은 나를 천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더군.”
더그는 율의 생각보다 많이 높은 사람이었다. 천사들의 관리자급되는 사람이 세 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더그였다. 아직 율을 보고 ‘M’이라고 부르던 빌의 물음이, 신이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점이, 왜 일반 천사도 아닌 천인 장이라 부르는 더그가 와서 자신을 데려가려고 하는지 어느 것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그에 관한 질문을 채 하기도 전에 그들이 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익숙한 듯 엘리베이터를 타는 더그와 그의 뒤를 따라가는 율 사이에 정적이 흐를 뿐이었다. 더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주저앉았지만, 더그는 익숙한 듯 가만히 서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가던 엘리베이터가 이내 멈추고, 엘리베이터가 채 열리기 전 율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