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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2. 2022

[M :신과 악마의 내기] #6. 이승

내심 서운해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한 미가엘과의 작별인사 후 더그와 율이 이승에 내려왔다. 이승에서는 1년의 시간이었지만, 율에게는 무려 백 년의 시간이었다. 마음속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하린을 볼 수 있었다. 얼굴 잊을까 매일 머릿속에 그리며 살았다. 하린의 모습 어느 하나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그리며 기억했다. 이제야 그녀와 같은 공간 속에서 숨 쉴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린의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승에서의 업무를 배워야 했다. 백 년의 기다림보다 지금의 기다림이 더 힘들었다. 더그는 그런 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을 익숙한 카페로 데려갔다. 하린과 자주 가던 곳. 율이 죽은 후 천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렸던 카페였다. 카페는 여전히 밝았고 따뜻했다.

“이곳은 오랜만이네요.”

율의 말속에 반가움과 기쁨이 섞여있었다. 마치 고향에 온 사람처럼 들떠있었다. 여전히 멋진 풍경이었다. 하린과 카페에 기다랗게 열린 창에 나란히 앉아 풍경을 보던 때가 겹쳐 보였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던 중 먼저 적막을 깬 것은 율이었다.

“오늘은 영업을 안 하나 보네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이제부터 네가 운영할 곳이야.”

“네?”

“이제부터 이승에서의 업무는 이곳에서 볼 거라고. 내가 샀어.”

이승에서의 업무는 예상외로 간단했다.

첫째, 천사와 악마 사이에서 분쟁이 생긴다면 천사를 보호할 것.

둘째, 이승의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가할 수 없게 할 것.

셋째,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할 것.

더그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이승에서의 업무를 정리해주었다.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승에서 천사와 악마 사이의 분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난다 해도 율에게는 충분히 해결할 힘이 있었다. 더그의 말에 더 이상 질문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율의 머릿속은 이미 하린으로 잠식된 지 오래였다. 설명이 끝난 듯한 더그의 모습에 율이 이제 일어나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앉아봐.”

더그가 낮은 목소리로 율을 불렀다.

“네가 천인장이 되는 선택을 할 때, 그 결정에 따른 책임도 네가 진다는 것 기억해?”

“네 기억하죠.”

“요즘 지옥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지금 지옥에서 군림하는 대악마 ‘무어’와 ‘M’. 둘 사이에 견제가 시작된 것 같더군. 기회만 된다면 지옥을 관리하는 무어조차 죽일 수 있는 자와 그런 미드를 견제하는 무어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거지.”

“미드라는 남자가 무어도 죽일 수 있나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 또한 같은 악마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다만 무어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그럴 수 없는 것뿐이지.”

“근데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는 거죠?”

더그는 잠시 망설였다. 대천사가 되기 위해서 지옥의 상황을 알아야 해서 말해준다기에는 그 시기가 조금 이상했다. 만일 정말 그 이유였다면 천국에서 이야기도 했어도 되는 일이었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율의 시선을 느끼고는 더그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무어나, 미드나 모두 너의 힘을 노릴 거야. 네가 자신의 편에 서주길 바라겠지. 무어는 미드를 견제하기 위해. 미드는 무어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그리고 그런 너를 설득하려면 네가 가진 약점이 있어야 할 테고.”

잠시 생각하던 율의 눈이 커지면서 더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게 하린이라는 건가요?”

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더그가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괜찮아. 이승에선 겨우 1년이지만, 천사와 악마의 시간으로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악마들은 그런 오래가는 사랑 자체를 믿지 않거든. 하지만 네가 다시 하린의 앞에 나타나 그녀를 아직도 사랑한다는 것이 드러나면 결국 너의 약점이 생기게 되겠지.”

“그럼 대천사가 된 지금도 하린이를 보지 말라는 건가요?”

율이 흥분해서 더그에게 말했다. 그런 율을 진정시키고자 더그는 벌떡 일어난 율을 자리에 앉히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린이를 보지 말라는 게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너의 자유이고, 선택이니까. 하지만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제가 만약 하린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더그가 한참을 망설였다. 이렇게까지 망설이니 더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더그는 작정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죽으면 다행. 최악의 경우 그녀를 지옥으로 데려가겠지. 너 때문에.”

적막한 카페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율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율은 그렇게 이승의 시간으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하린을 찾아가지 않았다. 가끔씩 하린이 살아있다는 그 숨소리만을 들을 뿐 하린의 얼굴을 보지도, 그녀의 대화를 엿듣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행동까지 악마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작은 행동들이 곧 하린에 대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부풀게 만들 것 같았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그렇게 율은 자신의 희망이자 백 년이 지나도 사랑인 하린을 숨소리로 생사만 확인하고 있었다.           

더그가 천국으로 올라가고 많은 일이 있었다. 더그의 말처럼 천사와 악마 사이에 큰 분쟁은 없었다. 오히려 서로 조심하느라 마주치는 일조차 드물었다. 가끔 분쟁이 일어날 때면, 율이 가서 상황을 정리하곤 했는데, 이승에 내려온 시간 동안 그런 일은 손에 꼽았다. 정작 문제는 귀신들이었다. 귀신들은 사람을 놀리거나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귀신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었다. 귀신은 믿는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그 힘이 강력해졌다. 특히나 무당이 섬기는 귀신이 그다. 귀신들은 실제로 무당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과거를 알려주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도하게 하며 그들의 힘을 키워나갔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 역시 귀신이었는데, 이 귀신들의 힘 역시 컸다. 특히나 일본에는 각 신사 별로 믿는 귀신이 많고, 종류가 다양했다. 귀신이 아무리 힘이 커져도 천사나 악마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는 큰 위협이 됐다. 사고를 내 인간들의 생에 관여하기도 하고, 그들의 몸에 들어가 이승의 삶을 좇으며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율은 귀신을 처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이제는 율의 카페가 된 곳에서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율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율의 얼굴에 만족한 듯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뒤로 율은 세계 각지를 누볐다. 영국, 프랑스, 미국, 중국, 인도. 모든 곳을 누비며 나라에서 가장 크고 강한 귀신을 만났다. 귀신들은 하나같이 도망가기 바빴지만, 감히 대천사 앞에서 도망갈 수 있는 귀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귀신들을 잡아두고 율은 그들에게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너 앞으로 여기 애들 사고 치면 다 네 잘못이야.”

“네?”

율은 각 나라별로 가장 강력한 귀신들로 하여금 다른 귀신들을 관리하도록 하게 했다. 한 나라를 관리할 정도의 힘이 되지 않는 귀신이라면, 나라를 지역으로 쪼개어 지역별로 관리하게 했다. 율이 할 것이라고는 그저 매일같이 보고를 받고, 분쟁을 조정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엔 귀신들의 불만이 많았다. 매일같이 보고를 해야 했고, 귀신들을 관리해야 했다. 하지만 반강제적으로 시작한 일이 그들에게 이점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율은 그들이 나라와 지역을 관리하는 대신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보호해주었다. 덕분에 귀신들은 불필요한 세력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인간들이 자신들을 믿고 기도하도록 하게 하는 귀찮은 일 역시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귀신들은 그런 율을 잘 따랐다. 율도 귀신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모두 좋은 방식이었다. 덕분에 율은 세 번째 업무에 집중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카페에서 보낼 수 있었다.           

율의 세 번째 업무는 카페에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손님을 맞는 업무는 아니었다. 카페의 문은 아무나 열 수 없었다. 위에서 정해준 사람만이 문을 열 수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구식 팩스기의 작동 소리가 카페에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날 찾아올 손님에 대한 명단이 위에서 내려왔다. 찾아올 손님의 간단한 신상정보와, 내용, 비고까지. 손님은 다양했다. 남자, 여자, 노인, 꼬마 아이까지. 모두가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이곳 카페를 방문했다. 율은 그들에게 한 잔의 커피를 대접하며 위에서 지시한 내용대로 처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간단한 업무였다.

붉기도, 샛노랗기도 한 태양이 이제는 거리를 완전히 밝혔다. 카페 팩스기가 울릴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율은 한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 빈병을 평상 밑에 대충 넣어놓은 뒤, 1층으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팩스기는 이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율에게 종이를 건네고 있었다. 한 장. 신상정보와 함께 간단한 내용과 비고가 적혀있었다.          

ㅇ이름 : 이 한

ㅇ나이 : 27

ㅇ내용 : ▒

ㅇ비고 : 인연          

율은 종이 내용에 새겨져 있는 점자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종이에 적힌 남자의 사연이 율의 머릿속에 밀려들어왔다. 율은 곧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곱게 갈린 원두. 적당한 온도의 물로 따뜻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를 거의 내렸을 때쯤, 범이 문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종이에 적힌 그 남자였다.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 맞지?”

“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반말을 하며 커피를 권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 남자는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앉으라고. 커피 다 내렸으니까.”

남자의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명예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남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연이었다. 돈도, 명예도, 행복도 정해진 인연을 만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인생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인연을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었다. 남자의 모든 기도의 마지막은 언제나 신의 뜻대로 해달라는 말로 끝났다. 대학 입학시험에서도, 취업에서도, 모든 일에서 남자는 자신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신의 뜻을 구하고 바랐다. 남자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신은 남자에게 한 여자를 만나게 했다. 회사에서 만난 그 여자는 남자의 눈에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성실했고, 예쁜 외모에, 심지어 교회도 다녔다. 모든 것이 완벽한 여인을 남자의 앞에 나타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기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기도는 신의 뜻대로 해달라는 말로 끝났다. 그런 남자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이다. 말없이 커피잔을 비워가던 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율이었다.

“오늘은 지하철 타고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데요?”

“오늘 거기서 네 인연을 만날 거야. 믿던 안 믿던 네 자유지만.”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제 인연이 거기 있을 리도 없고.”

“회사에 있는 여자라면 잊어. 네 눈에만 완벽한 여자야. 여자는 허영심이 많고, 사치스러우며 사람의 인간성보다 조건을 먼저 보는 사람이야. 그 사람을 만나면 네 인생의 결말은 뻔한 거고.”

“그걸 어떻게...”

“신의 심부름꾼 정도 되는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온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지하철에서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여인은 네가 어떤 모습이던 널 사랑해주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고.”

복잡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율의 눈에 보였다. 복잡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남자는 율의 말대로 자신의 인연을 만날 것이다.

“그럼 회사의 그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거죠?”

“돈이 어느 정도 있고, 그럭저럭 조건이 잘 맞는 사람과 결혼하겠지. 하지만 그 결혼 생활은 상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을 테고, 곧 신에게 기도하겠지. 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게 본인이 그토록 원했던 일인지도 모르고. 어서 가봐 늦겠다. 가기 전에 우산 가져가고.”

“우산은 왜요? 이렇게 날이 맑은데..”

남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한 여자와 함께 우산을 쓸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인연이 될 것이다. 아직도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의 등을 떠밀며 율은 그만 가보라며 재촉했다. 남자는 그런 율에게 꾸벅 인사하더니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복잡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사람들은 종종 무엇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 채 자신이 원하는 바를 기도하곤 했다. 시험에 붙게 해 달라는 기도,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취직하게 해 달라는 기도. 셀 수 없이 많은 기도를 신에게 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 신이 원하는 것이라 착각하며. 율은 대천사가 된 이후로 그런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곤 했다. 기도가 원망이 될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결과가 달라진 적은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회사에 취직해서는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고,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얼마 되지 않아 퇴사했다. 시험에 붙어도 좋은 건 그때뿐, 다른 쪽으로 진로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길과 좋은 길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남자는 굉장히 특별했다.

'기특하네’

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위에서 내려온 팩스에 ‘연기’라는 도장을 찍어 올려 보냈다. 오늘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보다 급한 일을 처리해야 했다. 서둘러 팩스를 올려 보내고는 카페 문을 나섰다. 뒤따라오려는 범을 밀어 넣었다.

“금방 다녀올게. 얌전히 있어.”

싫다는 듯 칭얼대던 범이 곧 카페 구석자리에 가서 엎드렸다. 카페 문이 닫히는 동시에 율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간 곳에서 율은 빌을 만났다. 율이 죽고 나서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율은 더그에게서 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을 수 있었다. 빌은 악마가 된 지도 꽤 오래되었고, 악마 중에서도 상급 악마에 속한다고 했다. 그만큼 가진 힘도 위협적이었고, 다른 악마에 비해 그 힘이 컸다. 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중 빌이 율을 발견하고는 이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M’”

“뭐 제 이름은 아니지만 오랜만이네요. 바쁘신 분이 여긴 어쩐 일로?”

“저것 좀 쓰려고 하는데, 네가 갑자기 나올 줄은 몰랐네.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빌이 가리킨 곳에는 화귀(火鬼)인 지귀가 있었다. 지귀는 불을 다룰 줄 아는 귀신이었다. 지귀가 가진 힘에 그를 섬기며 따르는 무당들도 많아 그 세력이 조금 컸다. 악마들은 종종 세력이 큰 귀신들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강하게 하거나, 귀신을 죽여 따르는 인간들이 자신을 믿도록 하며 힘을 키우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하늘의 규율을 위반하는 것이었지만, 신과의 내기에서도 쉽게 규율을 어겼던 악마의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율이 지귀를 처음 봤을 때 지귀는 이곳저곳에서 불을 내며 사람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율을 만난 후로 율을 잘 따르고, 자기 지역의 귀신들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 지귀를 보고 ‘저것’이라고 지칭하는 빌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이 구겨졌다.

“소문이 사실인 거 확인했으면 가던 길 가시죠?”

율은 더그처럼 빌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악마를 좋아하지도 않고, 가뜩이나 율이 아끼는 지귀에게 대하는 행동 때문에 오히려 적대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빌 역시 그런 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대천사씩이나 되어서 하는 일이 고작 귀신 감싸는 일인가?”

“업무 중의 하나죠”

“그동안 공공연히 있었던 일이니까 초임 대천사께서는 그냥 가던 길 가는 게 어떤가?”

“초임이라 뭘 잘 몰라서. 오늘부터 바꿔보려고요.”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빌은 자존심이 셌다. 더그야 자신보다 오래된 천사이고, 그의 힘 또한 봤기 때문에 빌이 어쩌지 못했지만, 빌의 기억에 있는 율은 자신을 보자 더그의 뒤편으로 숨어 눈을 질끈 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 율이 자신에게 건방진 말투로 말을 하니 심히 거슬렸다. 빌의 눈이 점차 빨갛게 변하더니 한 손에서 검은 어둠을 꺼냈다. 곧 그는 어둠을 커다란 낫으로 만들었다. 싸우겠다는 의미였다.

“이제 말로 할 기분은 아니네.”

빌의 말을 들은 율이 등에 감춰져 있던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그러시던가.”

빌은 그런 율의 말투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율의 날개를 쳐다봤다. 더그의 것만큼이나 크고 강해 보였다. 그 오랜 시간 악마로 지낸 자신에게도 없는 날개가 고작 이승의 시간으로 1년 만에 생긴 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율과의 힘 차이가 난다는 걸 그제야 인지한 빌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었지만, 아직 지귀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떠난다면 분명 귀신들 사이에 소문은 빠르게 번질 것이고, 뒤에서 빌에 대해 얘기할 것이 분명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빌이 낫을 들고 지귀를 향해 날았다. 마치 율을 처음 봤을 때처럼 빠른 속도였다. 그때 무언가가 빌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더니 곧 빌의 몸에 꽂혔다. 그것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빌을 한참 뒤에 있는 벽까지 밀어다. 먼지가 사라지고 본 곳에 빌은 어둠으로 만들어진 긴 창에 몸이 박혀 벽에 꽂혀있었다. 율은 천천히 빌을 향해 걸어갔다. 그제야 빌은 율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더그에게서도 위압감을 느끼긴 했지만, 살의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율은 달랐다. 율의 표정과 말투 모든 것에서 살의가 담긴 위압감이 느껴졌고, 빌은 그런 율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온 율이 가만히 서서 벽에 꽂혀있는 빌을 말없이 쳐다보다 곧 그의 몸에서 창을 빼냈다.

“빛이 아닌 어둠에 찔렸으니 죽지는 않을 거예요.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을 땐 다른 게 당신 몸에 박혀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율이 뒤로 돌아 사라졌다. 율의 말대로 빌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악마는 어둠으로, 천사는 빛으로 죽일 수 없었다. 다만 그 힘의 크기가 클 때는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크기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빌은 그곳에 주저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한참 밑의 존재라 생각하는 귀신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인 것도, 자신을 보고 벌벌 떨던 율에게 이런 꼴을 당한 것 모두 빌의 자존심을 긁었다. 하늘에 빌이 울부짖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완전히 지친 율이 카페로 돌아와 털썩 드러누웠다. 고된 하루였다. 다행히 빌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율의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빌은 율에게 두려움의 존재였다. 처음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빌의 섬뜩한 눈이 다시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야 빌의 힘이 율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지만, 기억에서 오는 공포는 대천사인 율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천사가 된 후 첫 전투의 대상이 하필이면 악마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은 빌이었다. 첫 전투 치고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빌에 대한 두려운 기억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런 율의 기분을 알았는지 범이 율의 옆에 와 고개를 파묻었다. 그런 범을 쓰다듬으며 율의 떨리는 손도 곧 잠잠해졌다.          

범의 귀가 움직였다. 율도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골목으로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골목에는 율의 카페밖에 없었다. 필시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일 것이다. 문득 아침에 돌려보낸 문서가 생각났다. 바쁜 나머지 문서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위로 올려 보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긴 했지만, 이 정도의 배려도 없다는 것에 조금은 화가 났다.

“회사 복지 한 번 참 좋네.”

 불평 섞인 목소리와 동시에 카페 문이 열렸다. 문에 달린 이 내는 맑은 소리가 적막한 카페에 울려 퍼졌다. 문서를 읽지도 않고 올려 보낸 탓에 들어온 사람의 인적사항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곧 위에서 문서가 내려올 것이다. 문이 닫힐 때쯤 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사람에게 무심한 시선을 건넸다. 곧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커진 눈으로 다시 들어온 사람을 쳐다봤다. 둘 사이의 침묵이 흘렀다. 들어온 남자 역시 커진 눈으로 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율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친구, 용주였다.

“과거는 볼 필요 없겠는데.”

조금 전과는 다른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신의 시험일까.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것은 곧 위에서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율의 머릿속은 반가움과 의문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찼다. 천사는 신의 지시가 없다면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거나 그들의 생에 개입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왔다.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전혀 다른 길로 바꿔놓을 수도 있었으니까. 다만 대천사들은 스스로의 판단하에 인간의 삶에 개입해 그들의 인생의 방향을 수정하기도, 도움을 주기도, 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천사들 역시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들의 좋은 의도가 인간의 사후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율은 서둘러 구식 팩스기 앞으로 달려갔다. 없다. 어디에도 문서는 없었다. 용주가 어떤 내용으로 이곳에 오고, 어떻게 그의 인생을 수정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용을 알 수 없으니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물론 용주의 과거를 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대천사는 사람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율 역시 카페에 찾아오는 사람 외에도 자신이 직접 사람을 지켜보고 그들에게 인생의 해답을 조금씩 알려주곤 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였다. 위에서 보낸 사람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길을 안내해야 했다. 그것은 대천사인 율도 알 수 없는 더욱 앞선 걸음의 계획이었다. 긴 정적을 깬 것은 율이었다.

"반가워 형. "

"네가 어떻게.. "

자신의 눈앞에서 죽은 율의 시체를 봤다. 그뿐인가. 율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용주 본인이 직접 율의 뼛가루를 뿌렸다. 그런 율이 지금 용주의 눈앞에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이야기해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하늘의 규율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균형마저 깨뜨릴 수 있었다.

"할 말이 많겠지만, 일단 내일 다시 만나자. "

"뭐? "

"내일 다시 찾아와. 알았지? "

율은 용주를 허겁지겁 문을 열어 내보냈다. 진정된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머릿속 의문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분명 내일이면 다시 문서가 내려올 것이다. 판단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신의 장난인지, 신의 선물인지는 그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길고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팩스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요란스러운 소리가 이처럼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재빨리 팩스기 앞으로 다가갔다. 곧 문서가 나왔다. 흥분된 얼굴로 문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문서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을 뿐 용주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용주가 우연히 카페 문을 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신이 자신에게 준 선물일까. 여러 생각에 빠져있던 중 종소리가 카페에 울렸다. 용주였다. 위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이곳의 문을 2번이나 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야 생각이 정리된 듯 율은 용주를 꼭 끌어안았다. 분명 신의 선물일 것이라 생각하며.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하린이었다.

"하린이는 잘 지내? “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수만 번 자신의 욕심을 눌러왔다. 하린을 만나 다시 사랑할 수도 있었고,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율은 하린의 숨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린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 하지만 용주는 하린에 대한 율의 욕심에 기폭제와 같은 존재였다.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린과 같은 추억을 공유했고, 여전히 하린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소식을 듣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눌러왔던 마음을 조심스레 꺼냈다.     

용주에게서 들은 하린의 이야기는 반갑기도, 화가 나기도 하는 이야기였다. 율이 죽고 하린은 그간 하던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모 가족이 율과 함께 살던 집에서 계속 살도록 배려해주었지만, 차마 돈 한 푼 드리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하린 스스로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생활비가 필요했기에 공부를 포기하고 일자리를 구했다. 하지만 대학을 나오고도 취업이 되지 않는 시대에 하린을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어찌어찌 겨우 취직한 회계사무소에서는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치근덕대는 상사로 인해 채 한 달을 다니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율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졌다. 율이 있었다면 그 상사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혼내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회사에서 나와 거리를 걷던 중 하린은 한 카페의 구인공고를 보게 됐다. 문득 율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커피 팔면서 책이나 쓸까 하며 장난스레 이야기하던 그 말이. 그 길로 하린은 카페에 취직했다.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것이었지만, 열심히만 한다면 정직원이 될 수도 있었다. 꽤나 큰 기업이 운영하는 지점이었기에 급여도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이곳 역시 하린에게 치근덕대는 상사가 있었다. 하린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지위를 이용해 이런저런 힘든 일을 모두 하린에게 떠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쉽사리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곳만큼 급여가 괜찮은 곳은 찾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말을 마친 용주가 율을 쳐다봤을 때 율의 표정은 빨갛게 상기되어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하린의 일이라면 그토록 소심하던 율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율을 달래는 것은 용주의 몫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 “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율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없어졌다고 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것도 용주가 보는 눈앞에서. 카페에는 용주와 용주를 한껏 경계하며 꼬리를 세우고 있는 범이 있을 뿐이었다.          

이성을 잃고 찾아온 곳은 하린이 일하는 카페였다. 1층과 2층 모두를 쓰는 꽤나 큰 카페였다. 카페 유리창 뒤로 하린의 모습이 보였다. 큰 키에 뒤로 묶은 수수한 머리가 여전히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살아있을 때도, 죽었을 때도 매일이 하린이었다. 이승에 내려와서도 사랑하기에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하린을 백 년이 넘어 오늘 마주쳤다. 그렇게 피하려 했고, 목소리조차 듣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하린을 만나게 됐다. 율의 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곧 문이 열리며 사복으로 갈아입은 하린이 나왔다. 여전히 아름다운 하린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하지만 미소는 곧 불편한 표정으로 변했다. 하린의 근처로 고급 세단이 천천히 다가왔다. 조수석 창문을 내린 남자는 하린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타고 가라니까. 정말 아무 짓도 안 해. 데려다준다고. "

"됐습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

"아 글쎄 타라니까. 업무적으로 할 이야기도 있어. "

"내일 하시죠 점장님. "

"오늘만 타. 앞으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 "

잠시 망설이던 하린이 작정한 듯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남자는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차를 출발시켰다. 율의 손이 떨렸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망설이지도 않고 하린과 남자가 탄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편해 보이는 하린과 혼자 신나게 떠드는 남자 뒤로 율이 탔다.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남자는 어디론가 계속 이동했다. 율은 곧 눈을 감더니, 남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삶을 어려울 것이 없었다. 지역구 3선 의원 아버지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언제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성적을 받는 것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저 학교의 이사장이나 선생에게 돈 몇 푼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말하면 되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선생도 있었다. 다른 학생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대하는 선생들. 하지만 선생 하나 자르거나,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은 국회의원 아들에게는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넘쳤다. 물론 남자의 배경에 따라온 친구들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세상의 중심은 ‘돈’이었고, 자신에게 ‘돈’은 항상 있는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남자의 주변에는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탈은 즐거웠다. 자신보다 돈이 없고 약한 친구들을 괴롭혔고, 돈을 뺏었다. 돈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한도 없는 카드를 가지고 있던 터라 그런 코 묻은 돈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그들이 가진 돈을 뺏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재미있었다. 평소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놈이 고작 30만 원에 병원비라며 제발 돌려달라 애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친구들을 모아 약한 놈들을 흠씬 두들겨주었다. 차마 신고할 엄두도 못 냈지만, 신고해도 문제는 없었다. 돈이면 모든 일을 넘길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맞은 놈을 전학 보낼 수도 있었. 돈은 곧 권력이었다.          

20살이 되어서도 그런 삶은 여전했다. 공부 따위 하지 않아도 명문대학을 갈 수 있었고, 군대는 자신도 모르는 병명으로 면제되었다. 20살에 선물로 받은 건물과 외제차. 이제 적당한 때에 적당한 회사로 아버지의 이름을 대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곧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사람을 죽였다. 음주운전이었다. 사람을 죽인 죄책감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걱정이 먼저 되기 시작했다. 탄탄대로로 펼쳐진 자신의 인생을 별 거지 같은 남자 하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 집행유예가 나왔다.           

한 언론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고, 꽤나 난처한 상황이 됐다. 아버지 또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열심히 입김을 넣은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더 큰 사건으로 남자의 사건은 잊혀갔다. 하지만 당분간 조금은 조심히 지낼 필요가 있다는 아버지 말에 대기업 카페 점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꽤나 괜찮은 여자를 발견했다. 하린이었다. 처음에는 쉽게 넘어올 줄 알았다. 명품과 차, 그리고 집안. 모든 것이 완벽해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은 여자는 없었다. 하지만 하린은 달랐다. 그 어떤 것을 보여줘도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까지 가지고 싶던 것을 가지지 못한 적은 없었다.

“야 그 여자랑 결혼이라도 하려는 거야? 왜 그렇게 매달려?”

자신만큼 잘 나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녀석이 물었다.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런 족보도 없는 계집이랑 무슨 결혼이야. 몇 번 먹고 버리는 거지.”  

“그런 거면 힘들게 그러지 말고 한 번 데려와. 약 먹이면 쉽잖아.”

“약?”

남자의 친구들은 이미 마약을 하고 있었다. 이미 가질대로 가져 채워지지 않는 그의 친구들을 채워주는 것은 마약뿐이었다. 남자 역시 이미 약을 하고 있던 터였다. 오늘 서울 외곽의 한 별장에서 친구들과 파티를 벌일 것이다. 그리고 하린에게도 약을 먹일 것이다.          

감겨있던 율의 눈이 떠짐과 동시에 브레이크 유압이 터졌다. 당황한 남자가 핸들을 꺾었지만, 차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몇 바퀴를 굴러 뒤집어진 채로 멈췄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전복된 차에서 기어 나온 남자가 가까스로 차에 기댔다. 조수석에 있는 하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전화가 가기도 전에 남자의 손에 있던 핸드폰이 ‘펑’ 소리와 함께 터졌다. 곧 거리에 있는 모든 가로등 역시 특유의 폭발음과 함께 동시에 깨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게 깔렸다. 전복된 차 바로 위에 있던 가로등만이 남자를 비출 뿐이었다. 전복된 차 위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자. 32세.”

율이 낮고도 낮은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읊었다. 놀란 남자가 율을 쳐다보더니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야 너!”

“여전히 건방진 놈이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율이 한 손으로 남자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목이 졸린다는 듯 남자가 켁켁댔다.

“네가 음주운전으로 죽인 그 남자는 두 아이의 아빠였다. 병으로 아내를 일찍 잃고 택배기사를 하며 두 아이를 키웠지. 그날은 아이의 생일이었다. 물론 너는 보지 못했겠지. 사고 현장에 망가진 케이크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을.”

율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학생 때 그렇게나 괴롭히던 그 녀석들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고 있다. 네게 아무런 돈도 아니었던 그 30만 원은 한 녀석의 나이 든 할아버지 병원비이자 약값이었고, 약을 먹지 못한 그 노인은 결국 죽었지. 너 때문에.”

울분에 차오른다는 듯 율이 남자를 벽으로 던져버렸다. 남자가 벽에 부딪히며 그대로 박혔다. 율이 천천히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귀신이라도 본 듯 덜덜 떠는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죄의 눈물도, 후회의 눈물도 아닌 두려움의 눈물이었다. 율은 자신의 손가락을 남자의 이마에 가져갔다. 곧 남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이마에 알 수 없는 글자가 찍혔다.

“내 권한으로 너는 사후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악마도, 귀신도, ‘무’도 될 수 없다. 고통의 소리와 악마의 기괴한 웃음소리만이 가득한 곳에서 평생을 살아보아라. 정확히 10년 뒤, 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너의 사후를 알게 된 오늘부터 이승도 너에게는 지옥일 것이다.”

율이 말을 마치자 곧 남자가 벽에서 내려왔다. 뒤돌아 사라지는 율에게 켁켁소리와 함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율의 발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아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네가 할 것은 살려달라는 말이 아닌 용서를 구하는 말이어야 했다. 하지만 쓸데없이 용서를 구하지 마라. 나는 신처럼 관대하지 않으니. 어디 이승에서 그 잘난 돈으로 마음껏 살아보아라.”

말을 마치자마자 율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곧 구급대원이 도착해 남자를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 문 너머로 자신의 아버지가 보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행원들과 함께였다. 아버지는 의사에게 잔뜩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곧 병원의 큰 화면에 나와 있는 수술 번호에 자신의 이름이 제일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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