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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Dec 25. 2023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25

블랙 코미디





최근 캘거리 지역 뉴스에서는 산불과 관련된 소식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티끝 한 점 없이 맑았던 이 도시의 공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근처 주(州)에서 넘어온 스모그로 인해 한국에서 자주 겪었던 미세먼지 가득한 날씨보다 짙은 황색의 대기질을 띄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연기냄새로 인해 창문을 열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남자는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채로 밀려있던 사진 작업과 남은 반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에 대해 간략한 계획과 목표를 노트에 끄적여 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상황은 점점 나아졌다. 하지만 요 며칠 내내 하늘에서 한바탕 시원하게 비가 쏟아질 듯 말 듯 애매한 분위기를 내며 먹구름만을 잔뜩 띄우고 있던 탓에 그의 기분 또한 덩달아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 낮잠이나 잘까도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근 4일 동안 계속 노트북 앞에만 앉아있었던 그는 갑갑한 마음에 간단히 소화도 시킬 겸 카메라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늘 내리던 시청 역에 도착하기 직전, 창문 밖으로 불에 타 무너진 한 건물이 그의 눈에 비쳤다. 어떤 연유에 의해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경찰차와 소방차가 같이 현장에 있던 것으로 봐서는 누군가가 일부러 불을 지른 듯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오래 방치된 채 입구 옆쪽 사람 모양으로 낙서가 되었있었던 건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 현장 근처 주변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행인들은 크게 훼손이 된 잔해들 주변에 멈춰 펜스 너머의 장면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얼핏 들었던 그들의 대화로 보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건인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란 무엇일까?" 아직까지도 그가 명확하게 대답하는 데 애를 먹는 질문이다. 특히나 이런 일을 목격하면 더더욱 생각해 보게 되는 질문인데, 본인 딴에는 나름 진지하다고 생각해서 붙인 카테고리였지만 가면 갈수록 고민 없이 순간의 자극에 빠져 기록을 한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 일부러 무게를 잡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두 사이의 완벽한 균형에 최대한 가까워지려 하는 것이 이 매체를 사용하는 데 있어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복잡한 머리를 이고서 다운타운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날씨 때문이었는지 곳곳에 놓여 있던 야외 테이블에는 평소보다 사람들이 덜 채워져 있었다. 캘거리 스탬피드가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곳곳에는 다양한 홍보 포스터들과 깃발들이 휘날렸고, 새로 설치된 간이 부스 주변에서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도시에 대한 정보와 자잘한 이벤트들에 대한 내용을 소개해 주며 곧 이 도시의 대축제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나름 캘거리 짬 좀 먹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였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관광객 물이 덜 빠졌는지 직원들은 지나가는 그에게도 팸플릿을 나누어 주면서 여럿 로컬 맛집들을 가르쳐 주었다. 







다음 블록으로 넘어가기 위해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옆에 공룡 코스튬 옷을 입은 채로 카드 더미를 들고 있는 사람이 다가왔다. 이 친구도 아까 만났던 직원들과 같은 일행인가 했는데, 서로 눈이 마주치고 나서 그가 받았던 작은 종이를 읽어 보니 오늘 저녁에 있을 스탠딩 코미디 쇼에 관한 홍보내용이 담긴 QR코드가 인쇄되어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길을 건너려고 할 때, 그녀는 남자에게 한 가지 솔깃한 제안을 했다.




"혹시 사진 몇 장 찍어줄 수 있니? 도와주는 대신에 오늘 쇼 티켓값은 받지 않을게. 게스트들 라인업이 빵빵해서 재밌을 거야!"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흥미가 가긴 하네. 몇 시에 시작인데?" 



"8시까지 이 위치로 오면 돼.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될 거고, 도착해서 나한테 귀띔만 해 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찍힌 컷 두어 개 정도면 충분하다는 그녀의 말에 10분 정도 옆에서 가볍게 셔터를 누른 남자는 이따가 보자는 말을 끝으로 근처 쇼핑몰로 들어갔다. 구름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던 탓에 2시간 남짓 남았던 시간을 때우기 위해 큰 사이즈의 블랙커피 한잔을 홀짝이면서 밀려있던 유튜브 영상들을 정독한 남자는 8시보다 약간 늦게 지하에 위치해 있던 작은 바에 도착했다. 카운터에서 인원들을 체크하고 있던 그녀를 다시 만나고서 비어있던 맨 앞 끝에 앉은 그는 10분 정도 조금 뻘쭘한 상태로 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주변에 있던 불이 하나둘씩 꺼지며 조명이 스테이지를 밝혔고, 사회자 겸 참가자였던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후부터 참가자들은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와 준비해 온 자신들의 이야기와 '썰' 들을 풀어나갔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 날 라인업에 들어있던 인원 대부분이 다른 나라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로 인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와 캐릭터가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스토리들은 조금 낯설면서도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켰다. 당연하게도 남자는 모든 문장들을 100%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것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청중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웃음을 의도했던 부분에서 침묵이 이어졌기 때문.)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90분 간의 쇼를 즐기는 데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10시가 조금 넘어서 공연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관객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과 함께 포옹을 하고서 위로 올라와 근처에 있던 역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집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쯤 저녁을 다 먹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을 시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던 덕분에 생애 첫 스탠딩 코미디 쇼 까지 보게 된 것은 상당한 재수였다. 이전 같았으면 대화는커녕 얼른 자리를 피했을 텐데, 참 사진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람의 성격을 바꾸나 싶은 생각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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