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수염차의 추억
5살 딸은 의외로 세월이 깊은 어르신 입맛을 지녔다.
"아빠, 나 옥수수수염차 먹고 싶어."
몸에 해로운 음료도 아니고 옥수수수염차 하나 사 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겠냐마는, 이미 밤늦은 시간이다.
"빛이야, 지금은 너무 늦어서 나갈 수가 없고, 내일 아침에 빛이 어린이집 갔을 때 아빠가 혹시 안 까먹고 기억하면 사 둘게."
내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거의 99% 까먹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알겠어."
빛이는 이유가 타당하다 싶으면 바로 수긍하는 편이다. 게다가 이렇게 빠르게 포기하는 걸 보면 그렇게 많이 먹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내일 어린이집에 다녀와도 이 아이는 옥수수수염차를 찾지 않을 게 뻔하다.
다음 날 아침, 역시나 예상대로 옥수수수염차는 우리 둘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빛이의 어린이집 등원 후 동생 하늘이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 가만히 쉴 틈 없는 2살 아이와 쇼핑을 하면 정신이 쏙 빠진다. 그 와중에 난 기특하게도 옥수수수염차를 기억해 냈다. 스스로를 칭찬하며 잽싸게 한 병을 집었다.
'빛이가 얼마나 기뻐할까?'
덕분에 원래 사려고 했던 다진 고기를 빠뜨리고 왔지만, 빛이가 좋아하는 옥수수수염차와 맞바꿨으니 됐다.
하원 후 빛이와 집에 돌아왔다. 난 냉장고에서 옥수수수염차를 자신 있게 꺼내며 말했다.
"빛이야, 옥수수수염차 사놨어! 어제 말한 건데 아빠가 잘 기억했지?"
"응!"
신나서 '엄지척'을 날리는 딸에게 한마디 덧붙인다.
"빛이도 나중에 아빠 같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
그런데,
빛이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듣는다.
"내가 아빠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어때?"
"와......"
내 딸이지만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이럴 땐 그냥 대놓고 자랑하고 싶다.
삶을 일깨우는 좋은 글이나 영상을 보면 우린 늘 다른 사람을 먼저 떠올린다.
'내 배우자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이 글을 봤어야 하는데.'
'내 자식도 좀 그랬으면..'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먼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나만 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