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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자 T 아이

따뜻한 냉정함

by 윤슬기

"너 MBTI가 뭐야?"


만나는 친구마다 인사처럼 질문을 던지던 때가 있었다. 그만큼 'MBTI'가 한창 유행이었다. 지금은 MBTI가 떠오르는 화젯거리라기보다, 이미 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은 듯하다. 자세히 모르는 사람조차도 'E(외향형)'와 'I(내향형)', 'T(사고형)'와 'F(감정형)' 정도는 구분한다.


'MBTI 성향이 아이에게도 나타날까?'


아이들이 아직 어리지만, 세 아이를 지켜보니 한 뱃속에서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확실히 다르다. 하나는 겁이 별로 없고, 또 하나는 겁이 무척 많다. 마지막 하나는 '겁'이라는 개념을 아예 안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초등학생이 된 첫째 빛이는 굉장히 활동적이고, 장난도 많이 치는 개구쟁이다. 표정만 보면 'F' 성향이 강할 듯하나, 말하는 걸 보면 '대문자 T'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둘째 하늘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함이 있다.


하늘이가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하고 말하면, 빛이가 "너 입. 입에서 나는 냄새야. 가서 이 닦아."라며 단칼에 자른다든지, 예쁨 받고 있는 셋째를 시새움한 하늘이가 "별이 우리 집에 없었으면 좋겠어." 말하는 동시에, "그럼 니가 나가든지." 하는 식이다.


작년엔 유치원 등원길에 다른 유치원 다니는 동네 친구가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나도 빛이네 유치원 따라가고 싶다..." 하자, 빛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따라오고 싶으면 유치원을 옮겨."


하루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는데 빛이 친구 둘이서 말다툼이 일어났다. 그중 한 친구가 화가 잔뜩 나서 빛이에게 달려온다.


"빛이야, 너 이제 쟤랑 놀지 마! 알았지?"


빛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이미 얼굴에서 또 대문자 T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역시나 목소리의 톤이 사라진다.


"아니. 친구끼린 그러는 거 아니야."


엇. 뭐지? 냉정한데 따뜻하다. 나만 고슴도치 아빠라 감동인 건가? 어쨌든 내가 보기엔 참 멋졌다. 옳고 그름을 잃어버린 시대, 아닌 걸 '아니'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대문자 T의 냉철함'을 잘 간직했으면.




빛이가 방에서 혼자 책을 읽다가 달려와 묻는다.


"아빠, 등에서도 수염이 나?"

"아니."


"책에 그렇게 나와 있는데?"

"어디? 어? 진짜네?!"


'수염은 코 아래, 턱, 귀 옆 여러 군데에서 나요.'


책을 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등에도 잘 보면 털이 있고, 팔, 다리, 배에도 털이 있는데 왜 '머리카락', '눈썹', '수염' 등은 이름을 따로 붙여준 걸까.


똑같이 털이어도 뭔가 더 특별해서겠지? 같은 맥락으로, 똑같이 사람이지만 각 사람마다 이름이 있는 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특별하기 때문일 거다.


인간의 성향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편의상 MBTI를 이야기하면서도, MBTI로 사람 구분 짓는 걸 썩 좋아하진 않는 이유다.


우린 모두 특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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