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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말

이길 수 없는 상대

by 윤슬기

5살 딸의 인중이 새까맣다. 펜으로 장난치다가 그린 것 같은데 이럴 땐 혼내기도 어렵다. 그 꼴이 너무 우스워서.


내가 웃음이 터지면 아빠가 재밌어하는 줄 알고 다음에 또 그럴 게 뻔하다. 감정을 가다듬는다. 혀를 지긋이 물고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아본다. 이제 조심스럽게 이 난이도 높은 혼냄의 운을 뗀다.


"하늘아, 너 여기에 까만 거 뭐야?"

"이거? 하늘이가 수염을 그린 거야."


망했다. 벌써 흔들렸다. 하늘이가 대답하는 동안 인중에 까만 수염이 꿈틀거리는데 어찌 내 감정이 안 꿈틀대랴.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고인다. 옆에서 혼자 조용히 낄낄대던 엄마가 보다 못해 지원군으로 나섰다.


"하늘아, 연필이나 색연필은 종이에다만 하는 거야. 또 그러는 거 엄마가 보면 못쓰게 한다?!"

"엄마가 안 보면은?"


대폭발. 압력에 못 이긴 화산이 폭발하듯,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빠알게진 아내와 난 앙다물고 있던 턱근육에 긴장이 풀리며 결국 '빵' 터져버렸다.




장난감과 인형, 책들이 거실에서 함께 뒹군다. 거기에 종이와 색연필, 놀잇감으로 사용될 페트병과 휴지심까지 추가. 쌓여가는 물건들과 함께 스트레스도 차곡차곡 쌓인다.


"얘들아, 일루 와봐! 일단 여기 있는 거 다 치우고 놀아!"


야무지게 치우기 시작한 8살 빛이와, 뭐부터 손댈지 몰라 뒹굴거리는 5살 하늘이. 언니의 지시를 받아 꾸물꾸물 움직이긴 하지만 사실상 첫째 혼자 치우는 모양새다. 한참을 치우던 빛이가 묻는다.


"정리를 하는데 왜 끝이 없지?"


거니. 이때다 싶어 쏘아붙였다.


"너네가 끝도 없이 어질러 놨으니까 그렇지."


괜히 그랬다.


"아니지이! 어지르는 건 끝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지금 치우고 있지이~"


또 졌다.



하늘이가 우유를 쏟았다.


"하늘아, 실수로 그러는 건 괜찮아. 다음부터 조심하면 돼."


그날 이후 하늘인 '실수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하늘이가 '실수로' 언니를 때렸어."


모래놀이를 하지 말라고 한 날엔,

"하늘이가 '실수로' 손에 모래를 묻혔어."


하루는 가져가기로 한 우유를 미리 뜯어서 먹고 있기에 뭐라 했더니,

"원래 차에서 먹으려 했는데 '실수로' 까먹고 지금 먹는 거야."


아빠도 '실수로' 소리 지를 뻔했다.




하늘이 무너지면, 아이들도 알아서 어디론가 솟아난다. 아이들 걱정은 아이들에게 맡겨도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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