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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 일기

이층집 정원일기 11

by 일곱째별


띵똥~


잠결에 벨 소리가 들렸다.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일어나 보니 이 집에서 처음으로 잠옷을 입지 않고 잤다. 어젯밤 비로 불안했나 보다.


문을 열어보니 할아버지 두 분이 계셨다. 책 배달을 오신 것이다.

이틀 전 도서관에 가서 전국 공공도서관 이용증인 [책이음]으로 확인 등록한 후 어제 홈페이지에서 도서를 검색해서 시니어 딜리버리 신청했더니 다음 날 아침에 배달 온 것이었다. 심지어 토요일이었다.

최대 대출 권수인 다섯 권이 연두색 가방에 담겨 전달되었다.

이 빗속에 배달 온 할아버지는 시니어, 책 배달인 딜리버리로 도서관에 일자리를 잡은 분이다. 덕분에 젊은 내가 송구스럽게도 집에서 책을 받아보았다. 대신 반납은 2주 내에 직접 도서관에 가서 해야 한다.


받자마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사진과 문자가 왔다.

좀 전의 배달 완료 문자였다.

답문을 보냈다.

‘비 오는 날 감사합니다’

잠시 후

‘~^^’

이 정도 감각이면 여느 할아버지가 아니다.


내가 고른 책은 100, 200, 500, 800번대.


비는 퍼붓고 베란다 쪽 벽지는 젖고 나는 책에 몰두하다 보니 출출했다.

방학하면서 나갈 일이 없으니 장을 보지 않았지만 음식이 줄지도 않는다. 슬슬 냉장고를 비워야 한다.

오랜만에 얼마 남지 않은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고 각종 채소를 넣고 에그 스크램블을 했다. 채소를 꺼낸 김에 스튜를 해 놓을까 해서 집에 있는 채소를 종류별로 냄비에 썰어 넣고 물을 붓고 끓였다.

감자, 양파, 대파, 토마토, 가지.

잔잔한 채소 맛 이외의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소금도 넣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이걸 채소 스튜라고 할 수 있나 모르겠다.


주방에 있다 보니 쓰레기통이 눈에 띄었는데 통 밖으로 나온 일반 쓰레기봉투 손잡이에 깨 같은 게 보였다. 구더기 알이었다. 석 달 동안 10리터 일반쓰레기봉투를 두 번 버렸다. 50리터 재활용품 전용 봉투도 두 번 버렸다. 그만큼 쓰레기가 안 나오는데 지금은 여름철이라 벌레가 생긴 것이다. 쓰레기가 반밖에 차지 않아 봉투가 아까웠지만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쓰레기를 버리려면 300미터는 나가야 한다. 음식물쓰레기는 건물 옆 땅에 통을 파묻고 버리는데 뚜껑을 열 때마다 날파리와 구더기가 우글거린다. 아무리 EM희석액과 EM퇴비가루를 뿌려도 젖은 음식물 쓰레기에서 번식하는 벌레들을 당해낼 순 없다. 쓰레기는 사람이 사는데 반드시 발생하는 문제다. 잘 처리하는 방법 역시 사람 몫이다. 처치 곤란 핵쓰레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오늘은 그만.


덕분에 쓰레기 버리러 가는 길에 콩이랑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고 왔다. 개는 산책을 해야 배변을 자유롭게 한다. 여기는 시골이라 배변 봉투를 휴대하지 않아도 된다. 개는 알아서 전봇대나 풀숲에 처리한다. 사람 눈에 띄게 하질 않으며 저절로 식물의 거름이 되도록 한다. <강아지똥>의 권정생 선생님이 생각난다. 배변 봉투는 비닐이고 비닐과 플라스틱 처리도 심각한 환경문제가 아닌가. 자연스럽다는 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겠지.


산책 후 씻으니 늦은 오후, 며칠째 밥을 안 하고 있다. 비가 오니 기름기가 당겨 짜파게티를 끓였다. 스프를 넣을 때 영양을 생각해서 끓인 채소들도 넣고 비볐다. 내가 예상한 건 간짜장 정도였는데 싱겁고 이상한 짜파게티 맛이 탄생했다. 좋은 재료로 맛없게 요리하는 재주가 있나 보다. 그래도 내가 담근 상추물김치와 노각무침을 곁들이니 다 먹을 수 있었다.


친구 둘에게서 안부 문자들이 왔다. 이 지역에 비가 많이 온다고 걱정하는 이들이었다. 그중 요리 좀 하는 이에게 스튜 만드는 법을 물어봤다. 고기랑 MSG를 넣으란다. MSG는 없고 오래된 국거리용 냉동 한우와 냉동 새우를 넣었다. 유채유와 소금과 후추도 넣었다. 그제야 맛이라고 할 게 조금 났다.


초저녁이 되자 비가 잠시 그쳤다. 곧바로 콩이를 데리고 다시 동네 한 바퀴 돌았다. 콩이 몰골이 말이 아니다. 비 갠 날이면 진짜 목욕을 시켜줘야겠다.


비 갠, 비 갠...

비갠 [began]

무엇을 시작했을까?

오늘은 이 동네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대출해서 독서를 했다. 모처럼 하루에 세 권을 읽으니 뿌듯하다.


비가 그치니 풀벌레들이 소리를 높인다.

아주 잠시 노을빛이 돌았다 사라진 하늘은 잿빛이 되었다.

창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다.

오늘 하루도 무사하니 감사하다.


"다른 지역도 안녕하신지요? 부디 그러하길 바라옵니다."


아아... 이 글을 쓰자마자 다시 쏴아-하는 폭우소리가 난다.

한밤중에 내려가 마른 수건으로 콩이를 닦아주고 온다.

애정은 공포를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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