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27년이 지나 세 배 반이 비싸진 책.
학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산 책으로 함께 읽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에 역자도 황문수로 동일하다.
'사랑은 기술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기술(技術)은 (다음사전)
1.technology
2.technical
3.technique
4.skill
5.art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의 기술은 테크닉이나 스킬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사랑은 love가 아닌 loving, 즉 사랑하는 것(행위, 행동, 활동), 이라는 동사형 명사.
동사가 명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무수한 활동이 담겨야 할까.
우리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리고 밀접하게 느끼고 일체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격앙된 경험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p. 10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사랑의 열도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왔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p. 11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며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사랑은 원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p. 29
강렬한 열중으로 미쳐 버리고 목숨이라도 바칠 듯 빠져버리는 것을 사랑이라 여겼던 나를 초장부터 부끄럽게 만드는 책.
지난해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1, 2, 3권을 3주에 걸쳐 읽었고, 올해에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2주에 읽었다.
처음 읽는 <악령>이 지나치게 어려웠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세 번째 읽는 <사랑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읽게 한 <월든> 이 어려웠던 학생도 이 책은 쉽게 이해했다.
가르치는 게 아닌, 문해력 있는 어린 상대와 독서한 책을 다시 읽으며 이야기하는 건 카푸치노와 레모네이드의 조합처럼 전혀 달라서 즐겁다.
2. 사랑의 이론
1) 사랑,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한 해답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볼 수 있다. 어머니와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중략) '정서적'인 공서적 합일에서는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애착이 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그를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한다. (중략)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이다.
p. 26
공서적 융합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되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가학성 음란증'이다. 가학적 음란증적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감에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는 그를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된다. p. 27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 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p. 28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p. 32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p. 42
2)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사랑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된다. 사랑함으로써 그는 자아도취와 자기본위의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 고독과 고립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는 새로운 합일감, 참여감, 일체감을 느낀다. p. 50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p50~51
어머니는 삶에 신뢰를 갖고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애에게 감염되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의 일부를 어린애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로부터 떨어져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p. 54
3) 사랑의 대상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
3. 사랑과 현대 서양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오늘날 자주 볼 수 있는 이러한 신경증적 애정관계에 대한 다음 예는 정서적 발달 단계가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남자들은 말하자면 아직도 어머니의 젖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남자들은 아직도 어린애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 그들은 어머니의 보호, 사랑, 따뜻함, 배려, 칭찬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곧 그들이 필요로 하고 그들이 그녀의 자식이고 그들이 무력하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남자들은 그들을 사랑하도록 여자를 유인하려고 할 때, 그리고 이에 성공한 다음에도 매우 정답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여자에 대한 관계는 (사실상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지만) 표면적이고 무책임하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받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남자들에게는 보통 상당한 허영심이 있고 다소간 숨겨진 과장된 관념이 있다. p. 110~111
4. 사랑의 실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상대를 보호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고 존경해야 하고 알아(가)야 한다.
사랑을 하려면 훈련해야 하고 정신집중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이라는 관점에서는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생애를 바쳐야 한다. p. 139
이 정도까지 학생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 나이 정도 되면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면 상대를 보호하고 책임지고 존경하고 알아가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내게 부족한 건 기술이 아닐까.
정신집중, 인내, 관심은 배우지 않아도 지나칠 정도로 잘한다.
문제는 훈련.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그 훈련은 전생애에 걸쳐해야 한다.
이 책을 서너 번쯤 읽었는데, 예전에는 문자로 이해한 부분이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3. 사랑과 현대 서양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성적 행복은 - 심지어 이른바 성의 기교에 대한 지식조차도 - 사랑의 결과이다. 만일 매일같이 관찰할 수 있는 일을 제쳐놓고 이러한 명제를 증명해야 한다면, 이러한 증거는 정신분석적 자료에서 풍부한 자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성적 문제 - 여자의 불감증과 남자의 다소간 심각한 심인성의 불능증 - 에 대한 연구는 그 원인이 올바른 기술에 대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억압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성에 대한 두려움 또는 증오가 신체적 접합이라는 친밀하고 직접적인 행동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주지 못하도록,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성의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난점의 근저에 놓여 있다. 성적으로 억압되고 있는 사람이 공포나 증오로부터 벗어난다면 그의, 또는 그녀의 성적 문제는 해결된다. 만일 공포나 증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성의 기교에 대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도 있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p. 104~105
몸은 확실히 알고 있다. 상대에 대한 감정을. 하지만 이것에도 오류가 있다. 성적 만족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분명히 틀린 해석이다. 사랑하면 성적으로 만족할 확률이 높지만 성적 만족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이것은 불륜이 사랑이 아님을 입증한다. 온갖 판타지를 지어내며 성적 만족에 눈이 어두워 물불 안 가리고 뜨거워졌다가 슬슬 현실적인 계산이 떠오르면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뻔뻔스럽게 가정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어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건 무책임한 기만이자 배신이다. 게다가 그걸 반복하는 사람에게서 신의를 찾는 건 악취 나는 오폐수에서 쓸만한 것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구제불능 인간이 하는, 책임도 보호도 없이 오로지 쾌락과 부정과 불안으로 응집된 그것은 파렴치하고 더러운 욕정 혹은 내재된 어둠에 의한 파괴 본능에 불과하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놀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경제적 책임만도 아니다. 그것은 믿고 책임지고 헌신하고 공유하고 공존하는 기쁘고 따스한 합일이다. 신자유주의시대에서 모든 가치가 환금성으로 대변된다 하더라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다. 사랑은 숭고하고 고결하며 생명력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삶의 원천이다.
*
십여 년 전 매주 금요일마다 영어원서 읽는 모임을 했었다. 한 3년 꾸준히, 그 후 2년은 띄엄띄엄.
성숙한 어른들의 모임이었고 5년 동안 교양 있는 여성들을 보며 무척 귀한 걸 배웠다.
그들로부터 받은 좋은 영향은 지금의 내가 있게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햇볕이 잘 드는 작은 공방 한 귀퉁이에서 글을 쓰고 마음 맞는 사람과 독서 모임을 하고 싶었다.
공방이 사라졌다.
중고차를 팔아 권리금을 내고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과 월세로 문 닫는 카페를 인수할까 했다.
다들 말렸다.
공간이 없으면 어떠한가.
일 년에 한두 번, 이렇게 카페에서 학생들과 독서 모임을 하는 것도 괜찮다.
작년엔 세 명이 세 번, 이번엔 일 대 일로 세 번.
학생이 교수보다 더 바쁜 세상에서 교수가 학생 스케줄에 맞추어 읽은 책을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는다. 그러면 또 어떤가.
문장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인한 숭상의 찬탄이 없어도 좋다. 나무 탁자 위에 드리워진 따사로운 햇살과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초록 식물과 나무로 만들어진 종이로 된 책만으로 이미 독서 모임의 반은 완성된다. 성별과 연령을 초월해 책을 읽고 만난 사람들, 그보다 더 고상한 모임이 있을까.
마침내 계절학기 종강을 했다.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이번 강의를 마친 소감을 말해보라고 했다.
대부분 내 학습목표대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졌다고 했다.
그중 한 학생이 말했다.
"대학 3년 동안 가장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강의였습니다."
까만 마스크와 모자로 가린 그 학생의 얼굴에서 날이 갈수록 초롱초롱해지는 눈동자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이번 학기의 기쁨이었다.
그랬다. 짧은 3주 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집중했고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갈피를 못 잡던 학생들은 자신을 정리해서 남에게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떠나보냈다.
3주라면 가능하다. 한 학기도 가능하다. 짧은 시간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내 인생에 걸쳐 긴 시간 가장 사랑해야 했던 사람들을 나는 얼마나 사랑했는가.
나는 그들을 보호하고 책임지고 존경하고 지식으로 대했는가.
나는 그들에게 집중하고 인내하고 관심을 가지는 훈련을 했는가.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랑은, 진정 사랑하는 관계는 목숨이 붙어있는 한 연결되어 있는 거였다.
각자 독립하되 연결돼 있는.
사랑 없이 살 수 없었던, 그래서 사랑을 찾아 떠난 내 인생은 과연 제대로 된 사랑을 했는가.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p. 57
내게 사랑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내면의 자유와 독립된 상태'의, '필요해서 사랑하는 게 아닌 사랑하기에 필요한 존재'를 만나는 기적.
그 기적을 현실로 공고히 다져나가는 예술.
그런데 열정과 책임을 다했어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땐 무엇이 부족한 걸까?
역시 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