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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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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Apr 21. 2024

thanks for the emptiness

텅 빔에 감사합니다.


통장의 잔고가 텅 비었습니다.

종류별 지폐를 비치해 두던 지갑에도 천 원 한 장 남았습니다.


영산강 자전거 순례 경비에 한 달 월급이 다 들어갔거든요.

괜찮습니다.

준비물은 초기투자비용이고, 식사는 병나지 않게 약 대신 먹은 거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광고비와 월세 내고 나니 이렇게 되었네요.

신용카드는 올해 안 쓰기로 작정했고, 적금 담보 대출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여기저기 꼬부쳐준 비상금을 찾아서 쓰고 있습니다.

그 마저도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가려던 제주도 세월호 10주기 사진전에는 못 가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평소에 식료품을 사러 가던 유기농 매장에 가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학원에서 만든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느라 쌀밥 지은 날도 며칠 되지 않습니다.

뭐든 쟁여두는 편이 아니라 냉장고는 늘 비어있습니다.

어제는 지난 가을에 받은 귀한 아기 무 마지막 반 개로 피클을 만들었습니다.

두 개 있던 라면도 어제 한 개, 오늘 한 개 다 끓여 먹었습니다.

냉동실 떡국떡도 함께요.

수미차가 사준 누룽지를 끓여도 먹고 기름에 튀겨도 먹습니다.

마지막 한 봉 남은 카페라떼 믹스커피를 마셨습니다.  

이젠 쌀과 시디 신 김치와 국수와 스파게티면 한 주먹 말고는 정말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자전거 타고 간 동네 성당의 신부님 신간을 사드렸습니다. 판매금 전액을 주일학교 위해 쓰신다잖아요.

11개월 만에 처음으로 자전거 세차를 하고 체인에 기름칠을 해 주었습니다.

수선화 구근이 든 화분과 해피트리 화분을 바꿔 주었습니다.

해피트리가 화사해졌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비워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이런 때가 있는데, 그때쯤이면 다시 재정비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때 송기역 글, 이상엽 사진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훑어봅니다.

금강과 영산강.

뷔나와 자전거 순례한 그 강가를 포함한, 그러니까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즉 4대강에 무슨 짓을 했는지 파헤침을 따라 들어가 봅니다.


딱 좋습니다.

별로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가난할 때 글이 나온다는 건 비교적 사실이니까요.

오랜만의 비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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