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책
한 학기에 두 번, 학생들 공책을 걷는다.
학기 초부터 말까지 매일 쓰기 과제 공책.
결코 만만치 않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써낸다.
공책을 걷으면 거실 탁자 위를 깨끗이 치운 뒤 가지런히 놓는다.
그리고 이름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위로 골라서 읽기 시작한다.
보통 이삼일이면 다 읽는데 이번에는 일주일이 걸렸다.
중간에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공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에는 연필이나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준다.
본인은 어떤 문장이 좋은지 모를 때 누군가 그게 잘 쓴 거라고 알려주면 그것보다 더 좋은 반응이 없기 때문이다.
다 읽고는 몇 줄의 글을 써준다.
공책을 나눠준 후 일대일 상담을 한다.
글쓰기한 소감을 듣고, 내 마음에 드는 문장과 학생 마음에 드는 문장을 대조해 보고, 간단한 일상과 계획을 묻고, 다음을 도모한다.
더러 학생들이 내가 써 준 글에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표현하는 학생은 글도 잘 쓴다.
쓰기나 말하기나 표현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간혹 눈물을 글썽이는 학생도 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또르르르 또르르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토도독 토도독 턱 밑으로 떨어지는 학생이 있었다.
첫 학기에 내가 써 준 글을 보고 울음이 터져 입을 막고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간 학생이 있었다.
내가 글 속에 새겨놓은 자신을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오늘처럼 눈물을 투두두둑 투두두둑 흘리는 학생은 처음 보았다.
나는 안다.
그 학생이 왜 울었는지.
그리고 그건 내 글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민 손 때문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걸 알아주는 사람의 작은 몸짓에도 눈물이 우수수 떨어지는가.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내 가슴속 뇌관을 건드린 사람이 있었던가.
그래서 아주 작은 몸짓과 몇 마디 말에도 통곡하고 말았던가.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나날은 어느덧 지나가 버린 것인가.
어쩌면 그때 내 고통의 요인도 지금 그 학생의 패인처럼 남이 보기엔 별 거 아닌,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을까?
상처 중에 제일 큰 상처는 자신의 상처이고,
고통 중에 가장 아픈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다.
그러니 자신과 타인의 고통은 경중을 가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왜 숨 넘어갈 듯 고통스럽지 않은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진 고난을 헤치고 내가 터득한 한 가지가 있다.
구부득고(求不得苦)-구해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