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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선물

by 일곱째별


놀랍게도 지난 10월에 식료품을 딱 한 번 샀다.

그것도 아주 기본적인 달걀 열 알과 두부 두 모와 닭 가슴살과 그릭요거트 한 통과 철 지난 과일 조금 정도에 도합 43,000원.


정말인가 싶어 그전 달인 9월 지출을 살펴보았더니 중순 즈음에 자잘하게 장을 보았다.

역시 달걀과 두부와 닭 가슴살과 그릭요거트 정도를 세 번에 62,010원.


8월엔 식비 지출이 아예 없고,

7월엔 8월 새,사람행진 친구들이 오는 바람에 큰맘 먹고 생협 배송 한 번,

6월엔 소액 결제 몇 번,

5월에 한 번,

4월에 소액 결제 두 번,

3월에 소액 결제 두어 번.


그러고 보니 올해 엥겔지수는 최저치.

그래서 그랬나? 내가 바사삭 낙엽처럼 푸석푸석해지는 이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장고를 털겠다고 끝끝내 아무것도 사지 않고 버텼다.

텃밭의 부실한 가지를 먹으며 별로 들어있는 것도 없던 냉장고가 거의 텅 빌 즈음

배고픈 나를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방송작가협회의 햅쌀 10kg

평화바람의 떡국떡과 제주흑보리와 단호박과 양파와 과일과 꿀


그리고 어제 퇴근길에 온 전화,

큰고모가 한우 곰탕을 보내셨다고.

그렇게 안 먹으면 안 된다고. 먹어야 산다고.

오늘 그 곰탕이 배송되었다.


저녁이 창가에 내려앉기 전에 여섯 팩 중 하나를 끓이며 밥을 지었다.

다이어트도 아닌데 몇 주 동안 나를 위해 쌀밥을 지은 적이 별로 없었다.


밥을 지으며 올해 받은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숨이차의 설 떡국떡

큰고모의 장단콩 두유와 냉동 불고기와 오늘 온 한우 곰탕

이다의 단백질 두유와 초가을에 온 고구마

일주일 전 산하의 견과류

벗의 여름 죽순과 양파와 잼과 며칠 전 묵은지와 케냐 원두커피


그리고 어제 아침에 온 문자에 이어 오늘 바로 배달된 유기농 페퍼민트 차.

함께 들어있던 '정신 차려 글 쓰실 때 한 잔 드'시라는 카드.

뉴욕에서 한국에 오셨다가 조계사 근처에 묵으시며 그때 그 회화나무도 만나셨다는 분이 전하신 거였다.

귀정사에 있을 때니 벌써 3년 전.

그때 받았던 캐모마일은 하도 아껴 마셔 아직도 남아있다.


이렇게 아끼고 아끼는 내가 아끼지 않는 게 있으니 바로 선물.

아끼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데는 아끼지 않는 내가 눈을 뜨자마자 11월임을 확인하고 기차표를 예매해 전달했다. 두 주 후에 특강 오실 30년 지기에게.

잠시 후 그로부터 긴 글이 하나 전달되었다.

그의 소설 초고였다.


휴대전화기 자디잔 글씨로 대충 훑어보았는데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이렇게 바스라히 건조해지는 이유가 감수성 때문이었음을.

읽고 싶은 글을 읽지 못하고 교정이나 보고

쓰고 싶은 글을 쓰지 않으니

아무리 일을 해도 낙이 없음을, 흥이 나지 않음을, 남는 게 없음을.

나는 밥만으론 살 수 없는 사람임을.


기온은 몇 주만에 무섭게 하강하여 실내 온도 20도에서 19도 18도 17도...

계절이 순환하여 다시 추워지자 허기는 더해간다.

위장의 허기인지 감정의 허기인지


뜨거운 곰탕에 따끈한 밥을 말아먹고 따스한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글을 쓴다.

아니 이제 써야겠다.

글 같은 글을.




그러다...


오늘 처음 들은 노래

https://youtu.be/4eKBpXpUMO4?si=X0GHVhxeJIuCLc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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