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고서
귀정아, 너는 ‘호곡장’이라는 말을 들어봤니? 나는 박완서 님의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중 「부드러운 여행」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알게 됐어. 박완서 님은 지인 두 분과 중국 여행을 떠나. 그리고 그들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호곡장에 연유한 백탑을 보러 가게 되지. 바로 거기서 ‘호곡장’이라는 말이 나와.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멀리 백탑을 바라보면서 "내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 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라고 적고 있다. 내가 인용한 것은 고전국역 총서의 번역이지만 그중 호곡장에 대해선 딴 의견도 많은 듯했다. 울고 싶어라, 울 만하다 등등, 어떤 번역이 맞나 보다는 왜 울고 싶어 했는지 정확한 호곡장의 의미와 만나고 싶은 거였다."
- 박완서,『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그러니까, ‘호곡장’은 한바탕 울기 좋은 땅이란 뜻이야. 글에서 박완서 님의 일행은 기대와는 달리 유감스럽게도 연암의 호곡장과는 일치하지 않았다고 해. 하지만 여행하는 동안 박완서 님을 비롯하여 세분은 모두 자신의 호곡장을 경험하는데, 그 장소가 모두 다 달랐어. 연암 호곡장의 의미와 만나고자 일행을 백탑으로 이끌었던 이 소장은 단동에서, 송우혜 님은 두만강 강가에서, 저자 박완서 님은 연길에서. 여행 내내 동행을 해준 고마운 분들의 인심 어린 배웅을 받고서 본인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울음을 터뜨리셨지.
"두만강 강가에서 송우혜가 울 때 하도 인정머리 없이 야단만 쳐서 이이화 소장한테 돌같이 차다는 별명을 들은 나의 눈물을 다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은 나도 뜻밖이었다. 눈물처럼 각자의 고유한 정서에 닿아 있는 것도 없지만 불가해한 것도 없다 싶었다."
- 박완서,『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님은 자신의 호곡장을 경험하곤 그제야 일행의 눈물을 이해하게 돼. 각자의 고유한 정서에 닿아 있는 것도 없지만 불가해한 그 눈물을 말이야. 어쩌자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복받쳤다고 고백하시지. 처음부터 정해진 호곡장이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누군가의 호곡장의 의미와 정확히 만나기를 기대한다는 건 어쩌면 어리석은 일지도 몰라. 더구나 누군가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고 타박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박완서 님은 끝에 세 사람의 호곡장은 다 달랐어도 결국은 한 뿌리에 닿아 있었음을 깨달으시면서 글을 마무리 지으셨단다.
'한바탕 울기 좋은 땅'이라니! 세상에 그런 곳이 있을까? 있다면 너와 같이 가서 부끄러움 없이 속 시원하게 울어 버릴 텐데. 우리는 눈물이 나오기도 전에 그것을 숨기고 감추는 데 익숙하잖아. 눈물이 내가 가진 약한 부분을 드러내기라도 할까 봐 겁먹잖아. 세상은 그걸 보고 울보라고 놀리고 손가락질하기 바쁘지. 그건 그들이 진정한 울음에 대해서 모르고 하는 소리야. 여기 연암 박지원의 ‘울음’에 대한 생각을 붙여볼게.
"사람들은 칠정 중에서 슬플 때만 울음이 나오는 줄로 알고 칠정의 모두에 울음이 나오는 줄은 모르고 있답니다. 기쁨이 사무치면 울음이 나오고, 분노가 사무치면 울음이 나오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고, 사랑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며, 미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고, 욕망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는 법이지요. 응어리지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서 시원하게 하는 것으로는 그 어떤 것도 소리보다 빠르지 않으니 울음이란 천지간 우레에도 비교할 수 있지요. 지극한 정에서 울음이 터지고, 터진 울음이 사리에 맞는다면 웃음과 울음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 정을 풀어내면서 일찍이 이런 지극한 처지를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칠정을 교묘하게 안배해서 울음을 슬픔의 짝으로 맞추어 놓았지요."
-임자현, 『마음 챙김의 인문학』
그의 얽매이지 않은 생각을 엿볼 수 있어. 마음껏 울라니! 칠정의 모든 곳에 울음이 깃들어 있다니! 우리는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하고 진정한 소리를 꽉 눌러 참고 억제하여 천지간에 갑갑하게 가두어 두기 때문에 그것을 잘 펼쳐서 풀어내지 못한다고.
이어 박지원은 자신의 울음이 갓난아기가 터뜨리는 그 울음과 같다고 말해.
"아이가 엄마의 태중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사방이 막혀있으니 옮매여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넓고 환한 곳으로 솟구쳐 나와 손을 펴고 발을 뻗으니, 마음과 뜻이 공활해져 시원할 테지요. 참된 소리를 내질러서 마음껏 한번 펼쳐내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그러니 갓난아기를 본받아 꾸밈없는 소리를 내야 마땅하지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면 거기도 울음을 터뜨리기 좋은 곳이고, 황해도 장연의 금산사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거기도 울음을 터뜨리기 좋은 곳이죠."
-임자현, 『마음 챙김의 인문학』중에서
호곡장! 딱히 장소에만 국한된 말은 아닐 거야. 나의 호곡장에 대해 생각이 미쳐. 나는 언제 어디서 나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을 터뜨렸었나! 하고 말이야. 그리고 너의 눈물을 떠올렸어. 우린 그리 친하지도 않았는데 서로에게 별의 별말을 다 한다고 했었지. 그러다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지. 나는 의아해했고 너는 멋쩍었지. 나는 그저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많아진다며 너의 등을 토닥였고 너를 참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때 우리가 ‘호곡장’을 알았더라면 ‘가히 울 만하구나,’ 했을지도 몰라.
아무 때나, 주책없이 눈물이 난다고 했던 귀정아. 소맷자락에 눈물을 훔쳤던 귀정아. 너야말로 참된 소리로 지극한 정을 풀어낼 수 있는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갓난아기가 태어날 때 터뜨리는 그 울음과도 같이 정직하고 순수한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를 바라. 숨기지도 말고 감추지도 않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