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것

by 시 선


“와! 정말 너무 예뻐요!”


눈에 들어온 건 커피 위에 드리워진 하얀 하트였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조금은 납작하면서 통통한데 두루뭉술하지 않고 꼬리가 살짝 안쪽으로 말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마치 작은 생명체같이 살아있다면 통했을 법한 정(情)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에 예민하게 또는 유별나게 반응했던 그것을 나는 그냥 ‘너무 예쁘다’는 말로 퉁쳤고, 카페 사장님 또한 대수롭지 않게 씨익 한 번 웃고 말았다.


하트가 망가질라 조심스레 텀블러 뚜껑을 닫고 품에 안아 카페를 나섰다. 도서관에 도착해 컴퓨터 자리에 가방을 내리고 장갑과 모자, 마스크, 목도리를 차례대로 벗어두고 의자에 앉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컴퓨터에 로그인하여 자리를 맡아둬야 할 테지만, 그보다 먼저 할 일은 텀블러 뚜껑을 여는 일이다.

마음과 달리 텀블러가 바로 열리지 않았다. 아마 바깥공기와 온도 차이가 심해서일 거다. 조금 더 힘을 써 뚜껑을 돌리다가 그만 책상에 커피를 흘리고 입고 있던 하얀 니트에 얼룩까지 남겼지만, 그 순간 내가 정말 속상했던 건 아까 그 하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카페에서 도서관으로 걸어오는 사이 커피와 하트가 한 데 섞이고 흔들려 커피색 거품만 잔뜩 있었다. 그새 하트는 어디로 갔나. 이런 나와 상관없이 커피와 하트 무늬의 우유 거품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섞였을 터였다.


사실 원래 둘은 하나다. 카페 라테(Caffè Latte)란 커피(에스프레소)에 스팀 밀크(데운 우유)를 더해 만든 커피 음료니까. 새삼스럽지도 않다. 우유의 부드러움과 커피의 풍미가 은은하게 잘 어우러진 크리미하고 순한 맛. 바로 내가 라테를 즐겨 마시는 이유다. 어차피 라테를 마시면 하트가 망가지고 사라진다는 것도 빤히 알고 있지만, 지금 이토록 아쉬운 건 그 사랑스러운 하트를 다시 보고 천천히 음미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아까 사진을 찍어 둘 걸 그랬어’


머릿속을 스친다. 그랬다면 핸드폰에 고스란히 남았을 텐데, 후회를 한다. 그 순간의 감동과 기쁨을 한 번 더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다시 보기 위해 남기는 것이 사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보물 창고 같은 편리한 장치이자 수단이라는 것을.


그러자 불현듯, 내 핸드폰에 수많은 사진이 생각난다. 여유 공간 하나 없이 꽉 차 있는 내 핸드폰을. 새로운 앱을 깔 때마다 사진과 동영상을 일일이 확인하고 삭제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하는 내 핸드폰을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핸드폰을 얼마나 답답하게 여겼던가. 나도 안다. 그건 핸드폰의 문제가 아니다. 그 핸드폰의 주인인 나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그러니까 나는 나 자신을 답답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 사진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뭘까?

‘나는 왜 그 사진들을 지우지 못하는 걸까?’


가만히 내 핸드폰 사진첩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 내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대개 아까 하트처럼 내가 소중히 여겼던 순간들을 거기에 남겨 뒀다. 지금 쓰는 핸드폰에는 둘째가 태어나기도 전, 첫째가 네 살 때부터 찍은 사진들, 아마 10년 남짓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 용량이 부족해 핸드폰을 바꿨지만,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온 사진들 때문에 새 핸드폰도 금세 용량을 다 채우고 말았다. 그런지 꽤 오래됐다. 사실 지워도 그만인 것들도 많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은 사진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지우지 못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이래저래 소중하지 않은 사진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사진은 지우지 못하고 추억팔이만 하고 만다. 게다가 추억팔이만 하는 것도 아니다. 책이나 잡지, 강의, 웹페이지 자체를 스크랩해 둔 것도 많은데, 그것들을 지우면 나중에 왠지 필요할 일이 생길 것 같고, 그렇게 사진으로라도 붙잡아두지 않으면 내 머릿속에 기억되지 않을 것만 같다.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로서 놓쳐서는 안 될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나의 이런 성향은 때마다 자기 물건을 잘 버리고 비우며 정리하는 생활 습관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그 맥락이 같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물건이나 옷들도 잘 버리지 못한다. 옷장에는 20대 옷, 맞지도 않는 날씬한 시절의 옷, 화려하고 촌스러운 옷가지도 여러 벌이다. 내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아이 옷까지 있다. 첫째가 돌 촬영 때 입었던 옷과 모자, 내가 처음 임신했을 때 아이 주려고 동네에서 샀던 5천 원짜리 빈티지 원피스, 조카에게 물려받아 두 아이를 다 입혔던 샛노란 카디건까지. 나는 지난 과거의 감정과 추억에 방울방울 매달려 있다. 나중에 내 아이가 아이를 낳으면 물려주겠다며 모아두기까지 하니 어찌 말릴까.


그뿐이겠는가. 언젠가 리폼을 해야지 하며 쌓아둔 입지도 못하는 옷들, 디자이너로 일할 때 틈틈이 사 모았던 원단과 단추, 레이스, 딸의 액세서리 만들 때 썼던 부자재들 모두 다락방 박스에 처박혀있다. 게다가 한창 식물을 키우며 집에 들였던 화분들—이제 빈 화분이 더 많아졌다. 소잉(sewing)을 위한 잡동사니가 집안 곳곳에 쌓여 있다. 그나마 책은 최근에 한 번 기부해서 정리했지만, 아직도 많다. 둘째가 읽기를 바라며 정리하지 못하는 책들이 상당수다. 이런 나를 돌아보자니 거의 미련 아니면 집착이다.


내가 원래 미련이 많은 타입인가?


그렇다! 쿨하지 못해서 스스로 미안할 정도다. 나는 평소 쿨한 사람을 좋아하고 또 내가 쿨해지기를 바라지만 정작 나는 전혀 쿨하지 못하고 이렇게나 지지부진한 편이다. 뭐든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오래 붙들고 있다. 어제는 문득 모두 다 정리하고 집을 줄여 이사 가기를 바라기도 했다. 지금 내게 쌓여 있는 이 모든 게 지겨워졌기 때문일 거다. 10평 이상 줄인다면 지금껏 위에 열거한 것들이 버려지게 될 1순위가 될 터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버려도 나는 정말 괜찮을까? 아쉽지 않을까? 후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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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여태 모두 껴안고 살고 있을 일이다.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뭔가 자유롭고 가벼워지기를 바라면서. 이럴 때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느낀다. 다 버리고 홀가분해지기를 바라는 나와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하겠는 나. 그리고 이 둘을 다시 조율해야 하는 내가 있다. 그 내가 자아라고 한다면 나의 자아는 어떻게 그 둘을 조율해 나가겠는가. 어떻게 해야 나를 위한 일이겠는가.


결국 부지런해져야 할 것이다.

매일매일 버리고 비우기를 해야 할 것이다. 미련이 많은 내 성향은 게으름이 고착시킨 습관일지도 모른다. 습관적으로 버리지를 못하고, 습관적으로 남기기를 바라며, 습관적으로 미래의 나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언젠가는…’을 내세우며 당장 해결하지 않고 피하려는 현재 나의 이 게으름이 미래의 나에게 미뤄두는 것이리라.


텀블러에 하트는 없지만 내 기억 속에는 있다. 그것도 점점 흐려지겠지만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동과 기쁨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진정 충만했다. 설령 아까 하트를 사진 찍어 핸드폰에 남겼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그것은 순간의 감정이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모든 건 변하고 깨지고 사라지고 잊힌다. 순간순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이동한다. 고정하지 않는다. 사진으로, 물건으로 쌓아두는 것으로서 그 순간들을 영원히 머무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바람 자체가 허울이다.


어차피 삶은 순간들의 연속이다. 어느 한순간이 변하고 사라진다 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삶을 장식하고 무늬를 남길 테다.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면 더 이상 삶이 아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그만, 그 모든 미련 아니면 집착을 떨쳐 내기를, 감동과 기쁨과 축복과 환희 상실 잊고 싶지 않은 것들 또는 잊히지 않은 모든 것들을 다 흘려보내기를. 무엇으로도 붙잡아 둘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를.


그렇게 스스로 가벼워지기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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