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한 호의

by 시 선


“추운데 태워 줄게, 차 타고 가!”

“아니야, 걸어갈게, 걷는 거부터 시작이야!”


나는 커피를 내린다. 저울에 컵을 올리고 위에 *드리퍼를 놓는다. 필터를 드리퍼에 끼우고 뜨거운 물을 부어 *린싱한뒤 물은 버린다. 필터에 갈아 둔 원두를 담고 살짝 흔들어 평평하게 만든다. 그래야 물이 고르게 내려간다. 이때 원두 무게를 잘 확인한다. 원두 두 배의 물을 천천히 부어 30초간 뜸을 들인다.


“오늘 제일 춥다는데!

영하 8도라는데!

그냥 타고 가지?”


이제 본격적으로 핸드드립 한다. 세 차례 30초간 텀을 주며 60g씩 물을 붓는다. 물줄기는 가늘고 일정하게 가운데를 중심으로 500원짜리만 한 동그라미를 그린다. 이 추출 과정을 2분 40초 안에 끝내면 딱 좋다. 완벽한 거다. 혹시나 그렇지 않더라도 거기서 멈춘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이후 내리는 커피는 원두의 찌꺼기 성분까지 우러나와 커피 맛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대개 쓰고 텁텁한 맛이 난다. 산뜻하고 깔끔한 커피를 위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로 그때 컵에서 드리퍼를 거둬내야 한다. 그리고 100g 정도 가수를 한다. 남편은 디카페인 원두로, 나는 산미 있는 원두로 이렇게 두 번 반복한다.


전에 남편 같으면 차 타고 가라고 계속 강요하거나 아니면 차를 태워 준대도 타지 않는다고 내게 뭐라 했을 것이다.


그땐 나도 남편이 뭐라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고, 먼저 건네는 호의를 거듭 거절하기 미안하고 예의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남편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고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어디 돈 벌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 좋다고 도서관에 가는 것을 남편까지 대동하며 자동차 연료를 쓰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성격상 남에게 부탁하거나 번거롭게 하는 것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차 타고 다니는 그 편리함에 내가 익숙해지는 것도 싫었다. 조금 힘들어도 걸어가든 자전거를 타든 스스로 감당하기를 바랐다.


생각해 보면 남편도 아침마다 꽤 귀찮았을 일이다. 동네 마트도 차를 끌고 가는 그가 보기엔 내가 20분 남짓 걸어가는 길이 수고스럽고 안쓰러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남편으로서 어떤 의무감이나 의리에서 선뜻 호의를 베풀었을 것이다. 그만하면 생색내기에도 좋다. 여하튼 나를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받는 내 마음은 그리 편치만은 않았던 호의 또는 배려, 친절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남편이나 나나 이럴 일(남편이 아침 시간이 여유로운 날)이 또 얼마나 되겠어? 하며 서로 응했지만 이럴 일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점점 일상이 되면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내 쪽에서 먼저 용기 내어 말했다.


“다음에 내가 태워달라고 하면 그때 태워 주라”


남편도 이제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내려주는 커피를 받아 든다.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남편 한 잔, 나는 텀블러에 한 잔. 이로써 도서관에 갈 준비를 마쳤다. 남편이 대뜸 “앞까지 같이 갈까?” 한다. 일이 있을 때는 같이 나가기도 했고 그러다 아파트를 벗어나 큰 도로까지 나란히 걸었던 적도 있지만, 오늘처럼 아무 일도 없는데 나오겠다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추운 날에, 누구보다 날씨에 민감한 사람이, 나는 어쩐지 낯설어 “아니, 일없으면 안 나와도 돼, 밖에 엄청 춥다며”라고 대답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가방을 메고 털부츠를 신고 목도리로 무장을 했다. 어느새 남편이 간단하게 얇은 패딩 하나 걸치고 맨발에 크록스를 신고 앞서 나간다. “추울 텐데, 정말 추울 텐데!” 내가 재차 확인하자, 남편은 본인은 그렇게 춥게 입고서 나보고 마스크도 안 쓰냐며 되려 주의를 준다. 마스크는 내 패딩 주머니에 있었다. “아니, 일단 한 번 보게, 얼마나 추운지, 내가 상대해 주겠어!” 라며 남자들의 허세를 떤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니 바깥공기가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내 입가엔 김이 새어 나온다. 올겨울 첫 입김이다. 남편은 나오지 않고 현관문 뒤에 서서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도 이 뿌연 것을 봤겠지.


“안 나올 거니? 아깐 큰소리치더니! 유(you) 쫄(았니)?”

“아니, 이 정도면 괜찮은데! 걸을 만해!

바람만 안 불면 괜찮아!”

바로 그때 남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섭게 골바람이 쌩하고 불어온다. 무장한 나도 소스라치게 춥다. 절로 몸이 오그라든다. 재빨리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너 정말 괜찮겠어? 학다리에 맨발인데, 지금이라도 들어가."


난 대놓고 그를 놀려댄다. 남편은 얇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턱 밑으로 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닭살도 송골송골 매쳤다. 그는 "춥다, 춥다" 중얼거리며 아파트 관리 사무실까지 백 미터쯤 함께 걸어가더니, 이내 근처 계단으로 빠져 지하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에 풋 웃다가 문득 알게 됐다. 이제야 그가 내 도서관 가는 길을 존중하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그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자기 입장에서 호의를 거두고 나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거야말로 나를 진정 위하는 마음 아닐까. 나를 응원한다는 뜻 아닐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상대에게' 친절한 마음으로 배려나 도움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 방향이 상대를 향한 만큼, 호의의 본질은 사실 받는 이의 감각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주는 입장에서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고 정작 받는 입장은 간과할 때가 많다. 상대는 그저 고마워해야 하는 의무감이나 부담을 떠안는다. 이것은 진정한 호의라고 볼 수 없다. 상대가 필요한 순간,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호의'는 통한다. 즉,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호의만이 온전히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에게 불필요한 호의는 거절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좋다. 마찬가지로 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불필요한 호의를 받는 것은 오히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이제 나는 산뜻하게 호의를 거절할 줄 안다. 그도 더 이상 일방적으로 자신의 호의를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슬쩍, 가는 길을 배웅하고 만다.


전에 남편 차를 타고 다닐 때는 고맙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꼭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오늘은 굳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절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 짧은 배웅길에 어떤 진심을 느꼈다고 말하면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더 깊고 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사랑해” “고마워” “응원해” 하고 어딘가 희석되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동함으로써 행동에 깃든 마음이 상대의 가슴에 고스란히 스며드는 것이리라.


돌아가는 길에 그는 추위에 벌벌 떨며 내가 왜 따라 나왔지, 내가 왜 그랬지, 후회할지도 모른다. 평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가 할만한 행동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몰라도 나는 왠지 알 것만 같다.






*드리퍼 :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추출할 때 쓰는 도구

*린싱 : 종이 필터에 뜨거운 물을 부어 헹구는 것으로, 종이 냄새를 없애고 드리퍼와 서버를 예열하며 필터를 드리퍼에 밀착시키기 위한 과정

수요일 연재
이전 04화남기고 싶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