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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Oct 10. 2021

빗속을 걸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인생

나는 1일 1회, 또는 2회 아이들과 산책을 나간다.

웬만큼 날씨가 나쁘지 않은 이상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나가는데, 내가 이렇게 강박적이게 산책을 나가는 이유는 바로 '나도 좀 살고 싶어서'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둘째치고 우선 생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살고 싶어서 산책을 간다는 말'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우리 세 모녀가 보통 오전을 어떻게 보내는지 설명해야겠다.


새벽 어스름에 다섯살 첫째 아이가 깨면 다른 방에서 자던 내가 달려가 첫째를 달래고 팔 베개를 해줘서 다시 재운다.

아이가 자서 나도 눈 좀 붙이려는데 곧이어 둘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서 다시 둘째가 자고 있는 다른 방으로 달려간다.


둘째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고 젖을 먹여 재운 후 편한 자세로 누워 자고 싶지만 젖을 빼면 아이가 깰까 봐 가로로 누워 꼼짝 못 하는 불편한 자세로 잠에 드는데 달콤한 꿈에 빠진 순간 첫째 아이가 방문을 열고 "엄마"하고 부른다.

첫째가 내는 소리에 둘째가 깰까 봐 나는 서둘러, 그러나 최대한 조용히 첫째에게 간다.


첫째는 일어나자마자 책을 읽어 달라고 하거나 인형 놀이를 하자고 한다. 그렇게 30~40분쯤 놀고 나면 둘째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나는 둘째 기저귀를 갈아주고 더 놀자는 첫째를 달래며 아침을 준비한다.


식사는 대게 다섯 단계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밥을 두세 숟가락 먹는 둥 마는 둥 단계

 번째: 고구마, 삶은 달걀을 먹는 단계

번째: 우유 또는 요구르트와 콘플레이크 먹는 단계

네 번째: 과일을 먹는 단계(첫째가 간식 맛을 알아버린 이후에, 아침식사 때 이 단계는 거의 건너뛴다.)

다섯 번째: 간식(첫째는 하리보 젤리 5개, 텐텐 반개, 아이스크림 1/3, 둘째는 현미 과자, 크렌베리)


반쯤 자기 주도식(아이가 스스로 먹는 것)을 실천하는 우리 집은 식사 후에 아이 옷이며, 바닥이며, 식탁이며, 엄마 옷에, 심지어는 잠시 책을 가지러 간다든가 하는 이유로 거실 전체 여기저기에 음식이 잔뜩 떨어져서 집이 엉망이 된다.


아침 9시쯤 아침식사를 시작해서 간식까지 먹고, 여기저기 묻은 음식물을 닦고 나면 양치질하는 시간은 대략 10시 반이다.


양치질할 때는 '비폭력 대화'에서 배운 대로 "열매야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입을 막고 있네(관찰), 엄마가 열매 양치를 도와주려는데  어떻게 양치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불편하네(느낌), 고개 돌리고 손 좀 내려줄래(욕구/ 부탁)?"라고 말하면 아이는 당연히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한술 더 떠서 더 길게 말하라고 한다.

나는 어금니를 앙 다물고 같은 말을 조금 더 길게 말하고 마지막에 "짜잔"을 붙이는데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려서 양치질하는 것에 협조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이가 양치질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비폭력 대화는 일단 접어두고 칫솔을 아이 입에 재빠르게 넣어 양치질에 완고한 아이의 마음을 포기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씻기고 옷 갈아 입히면 11시에서 11시 반이다.


식사와 개인위생 간단한 집 정리가 끝나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절절이 깨닫는다. 한계다. 나는 한계에 봉착했다. 좋은 엄마, 다정한 엄마의 한계. 한 단계만 앞으로 가면 엄마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뺑덕어멈이 될 것 같다.


그래! 여기서 도망치자. 높디높은 하늘 아래로 도망치자. 나도 사람인데 숨 좀 쉬자!


그래야 살 거 같다는 생각에 나는 빨리 집 밖을 나가고 싶다.


보통 나는 이때 물, 갈아입을 옷, 기저귀, 물티슈, 간단한 간식을 챙겨 배낭에 넣고 아이 둘을 킥보드에 태워 밖으로 나간다. 우리의 첫 번째 산책이다. 나는 이때 세수만 겨우 하고 제발 아는 사람 안 만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절로 나오는 복장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마음이 급해서 도저히 적당한 옷을 찾아 갈아입을 세가 없다.


만약 이때 산책을 안 나간다면 집에서 복닥거리며 책 읽고 인형 놀이하고 트램펄린 위에서 함께 뛰고 자기 것을 만졌다며 짜증 내는 첫째를 달래고 언니가 장난감 안 준다며 우는 둘째를 어르면서 점심을 먹이고 둘째 낮잠을 재워야 할 것이다. 낮잠 후에 또 무한반복이다.


(참고로 나는 뇌 발달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직 아이들에게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 성격상 좀 대충 적당히 할 수가 없다. 나도 이런 내가 괴롭다.)


그래도  왜 '살고 싶어서 산책을 나가는지' 잘 모르겠는데 하시는 분,  정말 정말 이해하고 싶다는 분은, 취학 전 아이 둘과 하루 종일 집에 있어보시길 강력하게 권한다.


그렇게 힘들면, 징징대지 말고 어린이집 보내지 그러냐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고백하자면, 사실 내가 다섯 살인 첫째 아이를 지금까지 가정 보육하는 것은 '나'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전부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어서, 내가 육자로부터 받지 못했던 안정감을 아이게 게 줌으로 내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서, 언젠가 직장으로 돌아간 뒤 아이들과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내 모습을 자책하게 될까 봐 가정보육을 한다.


그러니까 90프로 정도는 나를 위해서 가정보육 중인 것이다.


나는 둘째 임신 중 만삭일 때도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다니며 아침 10시에 나가 오후 4시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이렇게 꽤 유난을 떨던 내가 처음 만난 위기는 둘째였으나, 둘째도  결국 엄마 품에 안긴 채 생후 한 달 만에 언니, 엄마와 함께 동네 놀이터 투어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아이들과 함께 오전 산책을 나섰다.


비가 오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에게 비옷을 입히고 발걸음 닿는 데로 집 앞 놀이터를 지나 길 건너 공원까지 걸었다. 


가는 도중 웅덩이를 만났다. 나는 웅덩이를 피해 걷는데 18개월 된 둘째 아이는 웅덩이를 첨벙거리며 가로질렀다. 그리고 되돌아가서 다시 물 튀기기를 반복했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도 자신의 발과 물이 만나는 지점. 첨벙하고 소리가 나는 바로 그 지점만 보았다. 아이는 놀이와 하나 된 듯 보였다.


그렇게 웅덩이에서 한참을 놀던 아이는 보도블록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길을 두고 길이 아닌 곳으로 걸어갔다.


단정히 닦인 길은 모두가 길이라 믿는 바른길이었으나 아이의 길은 아니었다.


아이는  풀이 자라는 언덕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 순간 그곳은 아이가 걷는 진짜 길이 되었다.


아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풀에 맺힌 빗방울이 아이의 옷에 매달렸다가 미끄러졌다. 주르륵. 아이의 발 밑에서 풀이 접혔다 다시 고개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천상의 존재였으나, 결국 뉴턴의 예언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구름 조각이 온 대지와 아이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아이를 보며 니체를 떠올렸다.


니체는 말했다.

힘이 축적된 자의 이상은 어린아이의 놀이다.


니체는 정신발달을 세 단계로 나누었고, 가장 이상적인 정신상태를 어린아이에 비유했다. 나는 빗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아이를 보며 왜 니체가 하필이면 정신의 가장 성숙한 형태를 '어린아이'유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이는 그 순간 온전히 자신의 희열에 몰입했다.

물웅덩이 안에서 발을 구르고, 언덕을 내려가는 아이는 다른 모든 당위에서 해방듯했다. 아이는 순진무구하고 즐겁게 삶에 참여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바로 거기에 존재했다.

과거니 미래니 하는것은 없었다. 현재만 남았다.

 

어른에게는 하찮고 귀찮은 웅덩이였지만 아이에게는 온 존재로 실존하는 영원의 발현이었다. 어른에겐 길옆 언덕이었지만 아이에게는 걸어가야만 하는곳 였다.


나는 아이를 보며

누구나 가는 그 길을 질문없이 걷던 나를 발견했다.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싶은지 내게 물은 적이 있던가?

내가 누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만큼, 아니 안 들을 만큼 신났던 적이 있던가?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이 됨을, 웅덩이 속에서 얼마나 신나게 발을 놀릴 수 있는지를 언제부터 잊었던갈까.


나는 누군가(이미 그가 누구인지 왜 그 길을 가야하는지 잊은채)정해준 길 위를 , 그렇게 모두가 오가는 무미건조한 길을, 바쁘게 걷다가  물 웅덩이도 푸른 언덕도 그냥 지나쳐 왔겠구나.


그날 그렇게 아이는 온몸으로 내게 스승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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