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커피 향을 따라 계단을 올라간다. 아침 7시 20분 카페테리아로 출근하는 중이다. 티나와 마이클은 벌써 나와 일을 시작하고 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활기차게 인사한다.
“굿모닝 티나? 굿모닝 마이클?”
나는 Work Study Student (학교에서 공부하며 일하는 학생)이다. 학교에 등록하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자 바로 카페테리아에 일자리를 신청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세 시간씩 일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나에게 좋은 기회를 준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루미, 당신은 학생이기 때문에 카페테리아에서 만든 음식은 모두 먹을 수 있어요. 단,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안 돼요.”
카페테리아로 출근한 첫날 매니저인 벤은 소덱소(Sodex 식품회사 이름)의 파란색 유니폼 상의와 모자를 주며 말했다. 이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침 식사로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 반쪽을 커피와 함께 먹었다. 점심은 마이클이 만든 그날의 특별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일해서 돈 벌고, 동료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하루 두 끼 식사도 해결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였다.
카페테리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쓰면 나는 카페테리아 직원이 된다. 1층 냉동 창고로 내려가 여러 종류의 냉동된 쿠키 박스를 카트에 싣고 온다. 각각의 오븐에 쿠키 반죽을 올려놓고 30분 타임을 맞춘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쿠키 굽는 일에 기대를 많이 했다.
‘정말 좋은 기회야. 이 기회에 오븐을 이용한 쿠키 굽는 법을 제대로 배워가야지.’
하지만 바로 실망하고 말았다. 이미 반죽된 냉동 쿠키 상자를 열어 오븐에 하나씩 올려놓고 시간만 맞추면 되었다. 쿠키가 다 익으면 오븐에서 꺼내 식힌다. 식힌 슈거쿠키, 초코칩쿠키, 오트밀쿠키, 카니발쿠키 등을 각각의 봉지에 담아 개별 포장하고 이름과 가격표를 붙여 진열하면 끝이다.
막 나온 따뜻한 쿠키를 진열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와서 묻는다.
“이거 바로 구운 거예요? 지금 살 수 있어요?”
“물론이지요.”
따끈따끈한 쿠키를 손에 들고 행복해하는 학생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바쁘게 쿠키를 구워 진열할 때쯤이면 매일 오시는 교수님 한 분이 계셨다. 그는 항상 개인 텀블러를 가지고 와서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만 가득 채워 갔다. 나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Good morning? What a beautiful day.” (좋은 아침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네요.)
하지만 그는 조용히 눈만 마주치고 가지고 온 텀블러에 커피만 가득 채운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지막이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I hope so.”(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무표정으로 커피만 채우고 같은 말만 남겼다.
“Good morning? TGIF (Thank God It’s Friday.") (하느님 감사합니다. 금요일이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라고 말을 해도 웃지도 않고 대답도 없이 오로지 그가 한 말이라곤 단 한마디였다.
“I hope so.”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쿠키를 진열하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바로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Good morning? Did you have a wonderful weekend?”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말 잘 보내셨어요?)
그는 나의 인사에는 대꾸도 없이 내가 일하는 모습을 쭉 지켜봤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날마다 행복한가요? 어떻게 항상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일할 수 있죠?”
“네, 행복합니다. 지금 영어를 배우는 학생인데 카페테리아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가능하다면 내 강의에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20분만 강의해 줄 수 있나요?”
나는 당황했고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네? 뭐라고요? 저한테 강의를 하라고요?”
“그래요. 내 학생들에게 당신이 날마다 행복한 이유를 말해 주세요.”
“I hope so. 죄송합니다. 내가 매일 행복한 이유는 정말 많아요. 하지만 영어를 못 해서 자신 없어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런데 거절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웠다. 한 달만 더 있다가 말한다면 해볼 수도 있을 텐데...... 미리 종이에 쓰고 외워서라도 한번 해볼까? 마음속에 갈등은 있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도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해보고 싶다.
만약 그때 강의를 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아시아의 동쪽 끝 한국에서 왔다.
나에게는 남편과 딸 둘, 아들 한 명이 있다.
자식들을 모두 키워놓고 내가 하고 싶은 영어공부를 하러 왔다.
이곳에서는 혼자 살고 있지만 1년 후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가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것이다.
60살인 내가 미국대학 카페테리아에서 재미있게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같이 일하는 동료, 학생, 교직원들과 부족한 영어로 소통하며 일할 수 있어 기쁘다.
매일 새벽 Robin(새)의 수다스러운 소리에 눈을 뜨면 웃음이 나온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좋아하는 루꼴라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고 먹을 수 있어 신난다.
한국 나물이 먹고 싶을 때 워터크래스(Water cress 물냉이)를 한국식으로 데치고 무쳐 먹을 수 있어 기분이 좋다.
이른 봄 하얀 눈 속에서 피어나는 Crocus(크로커스)를 보면 설렌다.
친구들이랑 아름다운 모나카시 크릭을 산책할 수 있어 황홀하다.
주말 아침이면 느긋하게 일어나 집 앞 파네라 브레드(Panera Bread, 빵 바구니)에 가서 치아바타 반쪽과 후지애플샐러드, 그리고 무제한 리필 되는 커피를 마시면 행복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면서 서서히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렇게 말한다면 학생들은 나를 나가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