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서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기술 발전에 의해 생겨나 오늘날까지 지대한 사랑을 받아오며 역사를 형성해왔다. 그런데 영화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으며 연극과 달리 우리가 마주보는 것은 실재 대상이 아니다. 결과물을 투영시켜주는 스크린을 바라볼 뿐이다. 지금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것도 없이 이미 거대한 하나의 산업이고 당연한 여가 생활이다. 하지만 백여 년 전, 생전 처음으로 하얀 직사각형 스크린 속에 비춰지는 일련의 프레임들을 보았을 때는 어떤 감정과 생각이 들었을까? 낯설고 두려우면서도 강하게 이끌렸을 것이다.
1902년도 영화 <활동사진 쇼에서의 조시 아저씨>가 있는데, 이는 ‘난생 처음 영화를 보고 너무도 감격하고 열중한 나머지 그 영화들 중 한 편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스크린을 찢어버린 한 시골뜨기’에 관한 영화이다.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바보같은 짓을 저질러버린 조시 아저씨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그는 스크린이 아닌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야 한다. 영화에 대해 의구심이 한 번이라도 든 이상, 우리는 더욱더 그리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스크린을 이해하고 이미지 속을 비우며 그것이 지탱하는 관계들을,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영화의 기제를 검토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에 대해 두어야할 주안점은 ‘현실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어떻게 기능하는가?’, ‘그 안에서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이다. 영화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두 권의 책 <영화에 관한 질문들>과 <욕망하는 영화기계>에서 찾은 내용을 기반으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영화는 이데올로기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대중적이든, 저항적이든, 해체적이든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인력 혹은 척력이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제형태이다. 이데올로기 분석은 시네마의 생산활동과 그 분석을 연관시킨다. 이데올로기들은 순수한 자율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시네마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적 표상들의 직접적인 반영의 역사도, 형식들의 관념성의 단순한 자율성의 역사도 아니고, 말하자면 영화가 주체성에 대한 개인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 취하고 확립한 의미의 생산들의 역사라는 이러한 관점에서 구상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특수한 사회적 사실, 제도 혹은 작업에 의해 강조되는 일련의 결정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시네마를 이루는 행위는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설명하듯이 “사물들, 사람들, 과정들 안에는 그것들이 그것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 동시에 그것들이 다른 것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재현의 환영을 균열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의 지점이자 재현과 의미 생산의 형식인 시네마의 역할은 무엇인가? 시네마는 무엇에 근거하여 팔리는가? 분석은 어떤 층위들에서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가? 산업, 기계, 텍스트들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산업은 영화의 직접적인 경제적 체계, 즉 생산, 분배, 소비 구조의 조직을 가리킨다. 텍스트, 즉 영화는 그 산업의 특수한 산물이다. 기계는 산물과 생산 사이에 붙들린 시네마 자체로써 특수한 의미작용 실천이다. 여기서 특수성이란 음향, 이미지, 쇼트, 내러티브 등의 특수한 약호들 사이에서 주체와 이데올로기를 각인시키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이질성을 의미한다.
“모든 영화는 우리에게 시네마를 보여주며 또한 모든 영화는 시네마의 죽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화기호학자 메츠의 언급은 시네마 체계의 특이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각 영화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요소들의 목록화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지금 영화의 기호학을 정의할 수 있는 타당성의 유일한 원칙은 영화를 텍스트로, 담론의 단위들로 취급하려는, 따라서 영화들에 영향을 미치고 또 영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상이한 체계들을 찾아내겠다는 의지이다.” 영화는 하나의 체계 혹은 통일성으로서가 아니라 연루시키는 체계로서 영화에 대한 분석은 하나의 단절되고 궁극적 원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역동성을 담아 과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영화기호학이란 이러한 텍스트의 활동성에 관한 것이어서 영화에 관한 온전하고 생동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무수한 시네마의 노출 속에서 살고있다. 주체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스크린 앞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스크린과의 대면을 위해 스스로를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분열되어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63년 자전적 영화인 <8 1/2>는 이 지점을 잘 다룬 영화이다. 영화 자체에 대해서, 감독의 영화 만들기에 대해서, 관객의 영화 보기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는 인식론적 영화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지어낸 가공의 서사 구조에 동화되지 않고, 단지 ‘영화’ 그 자체를 목격할 뿐이다.
이제 그럴듯한, 잘 꾸며진,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그러한 이야기 구조는 없다. ‘만들어진/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의 형식만이 덩그러니 화면 위로 흘러간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찍어냈다고 생각되는 영화가 어찌 그 세상과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 세상이 텍스트보다 더 가공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야기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가공의 세계를 현실보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생답게, ‘남자/여자’답게, 부모답게, 국민답게, 연인답게. 그러나 혹시 이러한 것들이 이미 오래 전에 구성된, 멋들어진 가공의 세계였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남들이 바라는 어떤 모습을 흉내내면서, 그 모습이 순수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을까.
본론으로 돌아와, 영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하기 위해 테크놀로지로써의 영화를 이해해야 한다. 메츠는 기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시네마로서 관계를 맺는 과정으로써 설명한다. “내가 보기에 기술적인 것은 역사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일종의 폐쇄된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인 것은, 그것이 작동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것의 근거가 되는 원리들이 과학적 진실임을 입증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것이 기능하는 방식(그 기계가 통제되는 방식들) - 그 이유와는 구분되는 – 은 결코 과학의 통제 아래 있지 않으며 사회-문화적 성격을 지닌 선택조건들만을 작동시킨다.”
테크놀로지의 자율성을 가정하고 시네마의 ’발명‘을 끊임없는 문제로 간주하는 관습적인 역사 서술들이 지니고 있는 오해는 시네마가 테크놀로지적인 것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네마는 테크놀로지적인 발명이 아니라 다층적으로 결정된 하나의 발전이자 과정이다. 시네마는 먼저 테크놀로지적인 것에 존재했다가 사회적인 것 속에서의 이러저러한 실천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네마의 역사는 테크놀로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함께 이룬 역사, 즉 결정들이 간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중적이고 상호작용하는 것이기도 한 역사, 출발점에서부터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존재하는 역사이다.
영화는 테크놀로지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영화의 생산은 기계적인 문제와 미적 문제들 모두에 직면한다.
이 인용문은 미학적 방침을, 테크놀로지적인 것으로부터 미적인 것의 분리를, 그리고 테크놀로지적인 것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다. 미적인 것과 테크놀로지적인 것 간의 관계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결정되는지 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난점으로 남아 있으며 효과적인 역사는 쓰여지지 않았다. 앞서 언급되었던 영화기호학은 이런 난점 속에서 영화 담론을 명료화하기 위해 등장한 방법론이다. 기호학을 비롯해 수많은 다른 방법론들이 있지만 어느 하나 유력한 주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시네마는 현대 인류와 큰 호흡을 나누고 있기에 분석하고자 하는 거대한 흐름은 변치않을 것이며 올바른 방향성에 있어서 유의미하다. 영화에 대한 궁극적 궁금함을 갖고 이 글을 쓴 것, 영화에 대해 쓴 글을 관심있게 찾아본 것 모두 마찬가지로 유의미한 움직임으로써 영화의 건전성에 기여하는 뜻깊은 관심일 것이다.
71기 조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