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악인은 없다
*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생각을 담았으며, 영화 <말레피센트>, <조커> , <크루엘라> 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완벽한 악인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최근들어 기존 영화에 나왔던 악당을 주인공으로, 악당의 인생을 내용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며 악당과 전형적인 영웅 캐릭터와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평면적이고 고전적인 영웅 캐릭터에 지루함을 느끼고, 입체적이고 사연 있는 악인, 즉 빌런 캐릭터에 열광하고 있다.
빌런(villain)의 어원은 로마의 농장(villa)에서 일하던 농민, 빌라누스(villanus)이다. 많은 중세시대 농민들이 기득권의 횡포로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며 도시민들에게 차별받았다. 참다 못한 빌라누스들은 도둑질과 폭력을 저질렀고, 도시를 기점으로 교역하는 상인들을 약탈하며 악인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빌런은 애초부터 완벽한 악인이 아니라, 아픈 사연이 있는 불완전한 악인들인 셈이다.
선과 악의 대결 구조가 주를 이루는 지난 영화들과 달리, 빌런 영화들에서는 ‘악당'의 사연이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동화 속 주인공이나 히어로의 정의 구현은 관객에게 통쾌함을 선물한다. 반면 악당의 사연과 비극적 선택을 비추는 작품들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고민하게끔 유도한다. 빌런 영화의 대표작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말레피센트>(2014), 배트맨의 <조커>(2019), 101마리의 달마시안의 <크루엘라>(2021)를 살펴보자.
‘말레피센트’는 2014년에 개봉한 영화로, 로버트 스트롬버그 감독의 작품이다.
말레피센트(maleficent)는 ‘해로운, 나쁜 짓을 하는’이라는 뜻의 단어이다. 원작 애니메이션인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마녀 말레피센트는 공주의 탄생식 날,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으로 찾아온다. 말레피센트는 자신을 초대하지 않은 것에 큰 불쾌감을 내비치며, 어린 공주가 16살이 되는 날, 물레방아에 찔려 죽게 될 거라고 저주를 걸고, 영화의 끝까지 공주에게 불행을 선사하고자 하는 완벽한 악인이다.
실사화 영화 ‘말레피센트’에서 말레피센트는 마녀가 아닌, 커다란 날개를 가진 무어스의 요정이다. 어린 시절 우연히 요정의 땅으로 들어온 인간 소년 스테판을 사랑하게 되지만, 스테판은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의 날개를 잘라 이웃 나라의 왕이 된다. 말레피센트는 분노하며 타락하고, 스테판의 딸 오로라가 태어나자 16살 생일날 물레바늘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지며, 진정한 사랑의 키스만이 그녀를 깨울 것이라 저주를 내린다. 왕은 세 요정과 함께 오로라를 대피시키지만, 세 요정들의 돌봄이 미숙한 걸 보고 말레피센트가 대신 몰래 오로라를 챙겨준다. 오로라는 그녀를 요정 대모로 따르고 숲속에서 필립 왕자를 우연히 만나 호감을 품게 되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다. 말레피센트는 저주를 건 것을 후회한다. 어느 날, 오로라는 세 요정으로부터 진실을 듣고 말레피센트에게 실망하며 스테판의 성으로 도망치지만 물레에 찔려 잠들어버린다. 말레피센트는 필립을 납치해 성으로 가지만, 필립의 키스도 그녀를 깨우진 못하자, 진실한 사랑따윈 없다며 눈물을 흘리고 오로라의 이마에 키스한다. 오로라는 기적적으로 깨어나고, 말레피센트는 탈출하는 과정에서 스테판에 의해 죽을 뻔 하지만 오로라가 날개를 되찾아줘 막아서는 병사들과 스테판을 물리치고 오로라, 필립, 세 요정과 무어스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난다.
원작에서 말레피센트는 복수에 눈이 먼 완벽한 악역에 가까웠지만, 알고보니 그녀는 사랑에 배신당한 고독한 요정이었다. 오히려 감상자들은 오로라 공주를 돌봐주고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또다시 오로라 공주와 정을 쌓고 그녀를 사랑으로 품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저주를 내린 이유에 공감하고, 그녀가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역으로 깨닫는다. 더 나아가, 순수한 요정이 타락할 정도로 중요한 마음, 얼어버린 마음도 녹이는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악당의 사연으로부터,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조커’는 2019년 개봉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작품이다.
배트맨이 주인공인 원작 코믹스나 영화에서, 조커는 광기에 찬 악당일 뿐이다. 복수심이나 사연이 있다기보다는, 악한 일 자체에 희열을 느끼고 배트맨을 상대하는 것에 유일하게 재미를 느껴 집착한다. 범죄 패턴은 딱히 정의내리기 힘들 정도로 제멋대로이다. 단순히 돈을 훔치기도 하고, 범죄를 예술로 여기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실행하기도 한다. 감상자들은 조커를 보며 종잡을 수 없는 빌런 정도로 여길 뿐,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반면 영화 ‘조커’에서는 병약한 아서가 광기 어린 조커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아서는 입양아로, 정신질환자였던 어머니의 학대와 가난에 시달리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다. 성인이 되어서도 학대받고 무시당하는 일은 일상이다. 그는 코미디언이 꿈이지만, 기분과 상관없이 웃음이 터지는 정신병이 있어 무대 위에서 관객의 놀림거리가 된다. 또, 돈을 벌기 위해 삐에로 복장에 광고판을 들고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지만 동네 불량배들은 재미 삼아 그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팬다. 동료는 배신하고 직장에서는 해고된다. 급기야 정신질환자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어 진료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된다. 아서는 왜 세상에 나에게 이런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절규한다. 잇달아 생기는 예상치 못한 불행들에, 그의 억울함과 분노, 광기는 극에 달하고, 결국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조커로 변해간다.
극 중 조커로 완전히 각성하기 전 인물인 아서 플렉은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갖고 있지만, 어떻게든 사회 속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서글픈 캐릭터다. 그의 예명은 ‘해피’지만, 아서는 살면서 단 1분조차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아서를 보며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불편한 감정이 든다. 기이한 행동과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를 어떻게든 운명 탓으로 돌려보려는 아서의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빈부격차로 양극화가 심한 고던 시가 우리의 세상과 닮아 있는 것을 보며 우리 세상 어딘가에도 아서가 있을 것만 같아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가 아서를 조커로 만든 방관자는 아닐지, 무엇이 아서를 조커로 만들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미치광이인줄로만 알았던 조커의 사연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영화에서 아서 플렉은 학대받은 입양아로, 커서도 양어머니 페니 플렉으로부터 꿈을 무시받는 등 사랑받지 못하며 살아왔다. 만약 아서가 화목한 가정에서 이해와 존중을 받으며 사랑받았다면 극중 내내 드러나는 불안과 위축된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또, 영화에서 아서는 고담 시가 복지 예산을 삭감함에 따라 더 이상 상담을 받지 못하게 된다. 선거에 출마하는 토마스 웨인을 비롯한 기득권층은 도시빈민들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사회적 무관심과 조소는 아서를 더욱더 고립시킨다. 우리는 조커의 사연을 보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사랑과, 약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사회가 필요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크루엘라’는 2021년 개봉작으로, 크레이그 길레스피가 메가폰을 잡았다.
원작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에서는 ‘크루엘라(cruel+ella) 드 빌(devil)’이라는 이름답게 신경질적이고 오만한, 악마(devil)같은 성격으로 나온다. 로저와 아니타의 집에서 유모가 그녀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컵케이크, 차를 재떨이 마냥 쓰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달마시안의 무늬에 반해 99마리의 달마시안을 죽여 그 모피로 코트를 만드려고 한 걸 보아 매우 잔인한 성격이기도 하다. 이처럼 원작에서 크루엘라는 제멋대로이고 악질적인 빌런에 불과하다.
실사화 영화 ‘크루엘라’는 크루엘라 드 빌이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크루엘라의 본명은 에스텔라로, 하층민으로 태어났지만 주체적이고 당당한 성격, 천재적인 재능과 센스를 가지고 있다. 에스텔라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동경해왔던 런던의 리버티백화점에 취직하여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에스텔라는 패션계의 거물인 바로네스 남작 부인의 눈에 띄어 디자이너로 스카우트된다. 그런데, 기성 주류인 남작부인은 에스텔라의 창의적인 디자인들을 다 자신의 것으로 독차지하려고 한다. 에스텔라는 이에 저항하며 천재성과 센스를 광기로 폭발시키고는 크루엘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재능 대 재능으로, 패션 대결을 펼치며 부조리에 맞서 싸운다.
실사화 영화 ‘크루엘라’의 배경은 1960, 70년대 영국 런던이다. 이 시기의 영국은 자유주의 수호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일삼고 기득권을 공고히 한 자유주의 정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부조리한 틀에 저항하던, 자유와 사회 반항의 시기였다. 크루엘라 역시 얼굴에 ‘미래(The Future)’라고 그리며 패션에 대한 능력 대결을 통해 자신의 디자인을 빼앗고 억압하던 남작부인, 나아가 사회 부조리에 저항한다. 사회적 틀에 갇힌 에스텔라라는 인물에서 벗어나 크루엘라라는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며, 우리는 사람이 자아를 발산함으로써 살아가고, 삶 자체가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해나가는 커다란 과정임을 깨닫는다.
빌런의 사연을 풀어낸 세 영화 ‘말레피센트’, ‘조커’, ‘크루엘라’는 사람이 사랑, 배려와 존중, 자아 실현으로 살아간다고 러닝타임 내내 외친다. 이 개념들은 악당과 그 어느 것 보다도 멀게 느껴지지만, 사연을 알고 난다면 악당과 떨어뜨릴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개념으로 다가온다. 결국 우리는 악당의 인생을 세밀하게 바라보며 히어로를 봤을 때의 동경이나 카타르시스와는 다른 철학적인 접근을 맞닥뜨린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진다.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는 이렇듯 감상자에게 신선한 충격과 삶에 대한 통찰을 주게 될 것이다. 아직 다뤄지지 않은 악당이 많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무궁무진한 영감을 주길 기대한다.
73기 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