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애니웨이>, <그을린 사랑>
*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생각을 담았으며,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그을린 사랑>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인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산다. 설령 아무런 일정 없이 집에 누워있는 날이라도, 우리는 유튜브나 사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사람의 얼굴을 본다. 인간의 얼굴은 후각, 청각, 시각, 미각과 같은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감각들을 한 곳에 품고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얼굴에는 단순 생명에 직결되는 감각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생각을, 새로운 철학을 촉발하게 하는 잠재력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얼굴의 잠재력을 현대의 철학자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가령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에 서구 철학의 유구한 문제였던 타자를 말살하는 독인 유아론(唯我論)의 해독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얼굴로서의 얼굴의 에피파니(철학적 자각)가 인류를 연다. … 얼굴의 현전 -‘타자’의 무한-은 … 제삼자의 현전이[다.]” - <전체성과 무한>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들뢰즈 역시 타자의 얼굴에 집중한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 얼굴은 레비나스의 얼굴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띤다. 우선 얼굴이라는 개념에 들어가기 전에 두 철학자의 ‘타자’ 개념을 먼저 비교해보자.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한 개인의 유아성을 깨부수는 것으로 출현하지만, 들뢰즈에게 타자는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이지 않았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촉매로 등장한다.
들뢰즈에게서 타인은 지각되는 자가 아니라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자이다.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구조로서의 타인이다.” 이 말을 간단하게 설명해보자. 나는 지금 주사위를 보고 있다. 나는 그 주사위의 모든 면을 한 번에 보고 싶다. 그러나 그 주사위를 도면상으로 나타내지 않는 한, 나는 내가 그것의 모든 면을 보려고 해도 최대 3개의 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지각은 3차원의 차원에서 특정 부분은 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그 뒷부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 정육면체를 돌려서 확인하는 방식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보다는 그 뒷부분에 타자가 있다면 문제가 더 쉽게 해결되지 않을까? 이렇게 한 물건을 인식할 때 타자는 우리의 지각을 확장해준다. 즉 “대상의 어떤 부분을 내가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나는 이 부분이 나에게는 안 보이지만, 동시에 타인에게는 보이는 부분으로 여긴다. 그 결과 내가 대상의 이 숨은 부분에 도달하려고 할 때, 나는 대상 뒤에 있는 타인과 결합하고, 그리하여 이미 예측했던 전체화를 할 수 있게 된다.”(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렇게 타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고 우리의 지각을 더욱 안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바로 이렇게 지각장의 근본으로서 등장하는 타인은 그의 시각을 이용하여 우리의 지각을 확실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의 얼굴을 통해 그가 겪었던 세계, 그가 보았던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월드컵 경기 중계방송을 생각해보자. 월드컵 경기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축구 경기이다. 그러나 중계방송을 보다 보면, 꽤나 많은 시간을 들여 관객의 얼굴을, 환호하거나 낙담해있는 관객의 얼굴을 비춰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관객의 얼굴을 통해 경기의 또 다른 부분, 이 경기가 재미있는 경기인지, 중요한 경기인지, 지루한 경기인지 등을 알 수 있다. 만약 중계방송에서 관객의 얼굴을 비춰주지 않고 경기만을 보여준다면, 역설적으로 현장감을 담아내지 못해 그 경기의 본질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중계가 될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은 그 사람이 겪었던 세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잠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친구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나에게 뛰어온다. 나는 그 친구가 단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친구에게 어떤 위험한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은 공포스럽게 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다. 공포에 질린 얼굴은 공포스럽게 하는 것을, 어떤 다른 것을 품고 있듯 함축하고 있으며 또 감싸고 있다.”(들뢰즈, 의미의 논리) 즉 공포에 질린 얼굴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인해 우리가 공포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얼굴이 함축하고 있는 것,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공포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서 인간적 지각 방식으로 무서움에 상응하는 표상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그 속에 구겨져 있는 세계를 펼쳐내어 그 사람이 겪었던 세상을 알게 되고 이러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더 넓게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타인을 펼칠 뿐이며 상응하는 가능 세계를 전개하고 실재화시킬 뿐이다.”(들뢰즈, 의미의 논리)
그러므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 영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인물의 인생을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한 인물의 얼굴을 자세히 보여주는 기법인 클로즈업의 역할이 바로 이러한 국면에서 중요해진다. 클로즈업이란 비록 영화의 표현기법 자체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등장인물의 얼굴을 비추어줌으로써 그 영화 속 세계를 우리 앞에 구겨진 채로 던져주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우리가 그 구겨진 세계를 펼쳐낼 때 영화의 세계는 우리의 새로운 지각장이 되며 우리는 더더욱 그 영화에 빠져들어 그 영화를 깊게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영화를 깊게 느꼈던 기억은 우리의 지각장을 한창 더 넓혀주고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세계를 알게 해줌으로써 세계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잘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다룬 영화에서 나타나는 등장인물의 얼굴은 더욱더 그 의미가 중요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가령 우리는 자비에 돌란의 <로렌스 애니웨이>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로렌스 애니웨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트랜스 젠더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 로렌스는 어느 날 갑자기 여성 애인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하며 지금의 성을 버리고 새 삶을 살고 싶다고 선언한다. 이 영화는 자비에 돌란 특유의 표현기법으로 트랜스 젠더의 삶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며 평소 우리가 신경 쓰고 있지 않던 사람들을 조명한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는 로렌스의 모습이 점점 달라져 간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점점 짙어지는 화장과 화려해지는 옷차림, 길어지는 머리 길이까지. 이렇게 우리가 그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을 때 솟아오르듯 등장하는 클로즈업은 로렌스의 얼굴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로렌스의 세계를,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트랜스 젠더의 세계를 알려준다.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남자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로렌스의 얼굴,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눈화장을 하고, 귀걸이를 걸고 있는 로렌스, 그러나 슬픔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그의 삶을 느끼고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로렌스의 얼굴 속에 구겨져 있는 그의 세계를 팽팽하게 펼쳐보자. 그렇다면, 저런 얼굴을 가지게 될 때까지 있었던 내적, 외적 갈등, 해방, 다툼, 좌절, 절망 모두를 우리는 지각할 수 있게 되고 그의 세계를 느낄 수 있게 된다. 프레드의 얼굴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로렌스 애니웨이>의 얼굴은 우리가 평소 알기 힘든 퀴어의 세계를 펼치게 해주었다면, <그을린 사랑>에서의 얼굴은 주인공의 비참한 인생을 보여주고 그것을 지각하고 느끼게 해줌으로써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 모든 실마리가 풀리고 절정에 다다를 때 주인공 나왈 마르완 클로즈업이 수영장에 튀어나온 머리처럼 나타난다. 이때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마지막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진실의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통해, 그녀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과 절망을 다시금 하나하나 상기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지각할 수 있게 되며 그녀의 삶이, 너무도 비참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을 그런 삶이 순간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런 것일까? 굳이 그녀의 삶을 곱씹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그녀의 비참한 삶을 알 수 있게 된다.
유명한 그림 엘리아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성경의 한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요19:5)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은 예수의 저 일화로도 유명하지만,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철학계의 이단아였던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대략적으로 서술해놓은 책 이름을 <이 사람을 보라>라고 지음으로써 자신을 마치 예수에 빗대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을 봐달라고 소리치는 저 책은 자신의 철학을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느껴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그 사람의 어느 부분을 보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마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세상이 보이는 ‘얼굴’을 보길 원할 것이다. 바로 영화는 클로즈업을 통해 우리에게 Ecce Homo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이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을 때 당신의 지평은 더욱 넓어졌는가? 그의 얼굴 속에서 당신은 어떤 세계를 알게 되었는가?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영화의 얼굴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77기 김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