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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M Aug 26. 2023

[8] <Beau is Afraid (2023)>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생각을 담았으며영화 <Beau is Afraid (2023)>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있습니다


1. 엄마 ‘모나’에 대한 양가감정


 영화에서 ‘보’는 아들에게 집착하는 ‘모나’에 대한 양가감정을 느낀다.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고, 그녀가 정신적 폭력을 그에게 가했다는 깨달음으로 삶을 향해 나아가려 하지만, 동시에 보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보는 정신과 의사에게 그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죄책감을 불어넣는 것 같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편을 들면서도 어머니의 입장에 어느 순간 얽매여 자책하게 된다. 영화의 주제가 양가감정인 것은 명백하다. 영화 초반부에서 정신과 의사는 보에게 “당신은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 동시에 죽지 않음을 바랄 수 있다”라고 말한다. 후반부에서도 보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서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죽기를 바람) 어머니의 구두를 잡고 매달리며 사과하는 장면에서(애착에 대한 욕구) 확인 가능하다. 



2. 심판 그리고 결말


 보는 영화에서 크게 두 번의 심판을 받는다. 


 첫 번째 심판은 숲속 마을에서의 연극(보의 환상이 구성했지만) 중 늙고 쇠약해져 죽어가는 보에게 천사가 주관한다. 천사는 보에게 그의 잘못을 뉘우치라고 말한다. 보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라고 되묻는다. —사실상 보는 연극에서 크게 윤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처럼 행복과 역경을 모두 겪고 쓸쓸히 혼자가 되는 모습이 연출되었으니— 그러자 보는 자신이 겁쟁이였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이 항상 존재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잘못임을 느낀다. 이 깨달음을 얻자 보의 환상 속 연극의 늙은 보는 마침내 가족과 재회하고 거의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나중에 환상이 깨지긴 하지만). 이 심판은 보가 어머니로부터 자립하고 진정 자유를 찾기 위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보는 이 환상 속 심판에서 어느 정도 자립성을 되찾고 어머니의 부재에서 비롯된 행복을 잠깐 즐긴다.

 두 번째 심판은 보가 어머니의 목을 조른 후 도망쳐 나왔을 때 배를 타고 이른 재판소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첫 번째 심판과는 다르게 보의 자립을 옹호하기보다는 어머니 ‘모나’의 입장을 옹호하는 심판이다. 애초에 재판소의 구성부터가 모나에게 권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검사는 번지르르한 공간에서 힘 있고 큰 목소리로 옹호하는 반면, 미약하게나마 보의 입장을 대변하는 변호사는 목소리도 잘 안 들리는 공간에 위치해서 악을 써가며 변호한다. 게다가 그 변호사는 공격당해 보의 입장을 변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솔직히 갑자기 그렇게 이상한 재판소가 존재한다는 것과 보가 편집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보의 환상 속 공간이라 볼 수 있는데, 결말 부분에서 환상 속 변호사와 보 모두 죽는 장면은 보의 양가감정 세계에서 보를 옹호하던 무의식이 죽음을 맞이하고 어머니를 옹호하는 무의식이 나머지를 정복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3. 로저와 그레이스


 군에서 아들을 잃은 이 가족은 보를 새 아들로 맞는다. 그런데 누가 봐도 굉장히 이상하다. 내 눈에는 로저 부부와 비교했을 때 보가 동년배 혹은 그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이는 보가 어머니에게 과의존했기에 독립성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1975년생인데도 남에게 의지하는 보. 이는 단순히 성인과 성인 사이의 상호의존을 넘어 부모와 갓난아이의 일차원적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로저 부부가 보를 “sweetheart”라는 애칭으로(주로 자식에게 쓰이는) 부르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 역시 그들에게 암묵적으로 순종한다.


4. 보의 인간관계

 

  보의 통화 기록을 보면 보는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다. 최근 통화 기록에 엄마, 정신과 의사, 집주인밖에 없다. 이 역시 보의 독립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오로지 어머니와 맺은 것이다. 그가 속해 있는 친밀성 기반 집단이 모자관계밖에 없으니, 그 이외의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보의 독립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어머니는 보의 세상이요,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 어머니는 보의 세상이요, 보는 어머니의 세상이다. 모나 와셔먼은 나름의 방식으로 보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운영하는 회사 MW에서 MW의 사업이 모두 보를 영감으로 삼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MW 제품의 모델이 보라는 점과, MW가 한 제품만 제공하는 회사가 아닌 보의 생애 주기에 맞추어 항정신성 약물— 보가 필요한—, 면도기 —역시 갓 수염이 난 보에게 필요한! —등 여러 제품을 개발하고 홍보한다. 솔직히 어떤 기업이 그런 전략을 짜겠는가. 보는 어머니 모나의 삶에 진득하게 침투하여 그녀의 세상이 모두 보가 되도록 만들었다.



5. 폭력적인 보의 동네

 

 묻지마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보의 동네는 매우 폭력적이다. 그러나 보가 편집증과 강박증 등 신경증적 증상을 보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동네가 실제로 폭력적이라기보다는 엄마를 찾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폭력들은 그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핑계라고 할 수 있다. 엄마를 찾아가려는 과정에서 보는 수많은 기이한 사건에 부닥치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찾아가지 못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불가피한 상황을 만들어 자신이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아들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아리 애스터 감독의 다른 장편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운명론적 전개를 선호한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은 예견되어 있고 보 역시 정해진 플롯을 충실히 따른다. 그래서 아리 애스터의 영화를 볼 때마다 많은 이들이 무망감을 느끼는 듯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운명론이 가진 불쾌함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의 작품은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답답함과 무기력만 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그가 관객의 — 적어도 나에게는—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능동성’과 ‘차라리 모든 것이 운명 지어졌으면 하는 수동성’이라는 두 상반된 입장을 동시에 대변하고, 양가감정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거북할지도 모르는 작품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정과 사고를 이해받거나 새로운 입장에 눈을 뜨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것. 그가 이 모든 거창한 의미를 예상하고 있지 않고 감정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다시 한번 애스터의 시선을 예찬한다. 그의 시선과 시선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참 닮고 싶다.


77기 오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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