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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M Aug 31. 2023

[9] “왜 영화여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영화에 대한 영화

 올해 극장에서는 ‘영화에 대한 영화’가 유독 많이 걸렸다. 2023년 2월 1일, 데미안 셔젤의 <바빌론>을 시작으로 3월 22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가 뒤를 이었고,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가 7월 5일 개봉하면서 그의 대표작인 <시네마 천국>과 레오 까락스의 <홀리모터스> 역시 에무시네마에서 재개봉 하는 등, 메타영화가 인기를 끌며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를 되짚어볼 기회가 풍부하게 주어졌다. 꼭 올해 개봉한 영화들이 아니더라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21세기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비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만 해도, 영화에 대한 거대한 은유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언급한 영화들 내부에는 감독 개개인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과, 영화의 역사, 영화의 기능과 역할, 영화만이 구현할 수 있는 매체적 특성 등이 녹아 있다. 이것들이 감독이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게끔 한 계기이며 관객이 이들 영화를 접하며 영화에 대한 설렘과 애정을 재확인할 수 있던 감동적인 순간의 촉매가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들 감독과 씨네필들이 영화라는 매체에 갖는 특별한 애정의 근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영화는 무엇이며, 어떤 점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여전히 떨리게 하고, 짙은 애정을 지니게 하는지 그 이유를 영화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리치오토 카뉴도의 명명에 따르면 ‘제 7의 예술’로 불리우는 영화는 타예술과는 구분되는 역사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독특하게도 기술의 발전에 의해 탄생하였으며, 기술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에 있다. 그 역사가 짧기 때문에 탄생 이후 수많은 운동이 존재해왔으며 계속 격동기를 겪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탄생 초기부터 슬라보예 지젝, 질 들뢰즈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영화라는 매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으며, 아폴리네르는 영화를 ‘이미지의 책(Livre d'images)’으로 정의하고 “미래의 예술”로 예견하였다. 영화는 현대에 가장 주목받는 예술의 한 형태이자,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최신 기술의 집약체인 것이다. 

 영화는 원본의 의미가 흐려진 기술복제시대의 중심에 서 있다. 초기 ‘활동 사진(moving picture)’이라고 불리었듯 영화는 디지털 이미지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사진이 회화에 객관성과 사실성을 부여하였다면, 영화는 멈춰 있던 사진에 ‘운동’을 더함으로써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정지되어 있던 사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흔히 최초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열차의 도착>이 극장에 상영될 때 사람들은 그 생동감에 놀라 소리를 지르고 스크린 뒤에 실제 열차가 있지는 않는지 영화가 끝난 이후 스크린을 들춰 보기까지 하였다. 이후 영화는 <재즈 싱어>를 통해 ‘말하는 영화(talking picture)’로 불리우던 유성 영화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시각적 체험에 청각적 체험까지 더해지며 기존의 무성영화 배우들이 몰락하고 영화의 시대는 새로운 진보를 이루어내며 큰 격변기를 겪었다. 이후 테크니컬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며 영화는 빛과 색을 입고 화려한 모습으로 더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z축까지 시각과 이미지를 확장하는 3D영화가 영화산업 내에서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시각적 체험에 청각적 체험까지 더해져 공감각적 이미지와 복합감각적 이미지를 상상이 아닌 감각할 수 있게끔 한다. 오늘날의 상영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돌비 레버러토리스 사의 3D 서라운드 음향기술인 돌비 애트모스는 이러한 감각과 체험의 폭을 더욱 확장시켰다. 즉 영화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탄생하고, 계속 확장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며, 인간이 가장 많은 감각을 사용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동향인 “체험”과도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매체인 것이다.


영화와 시공간 – 감각과 경험

 영화의 특징이자 매력 중 하나로 ‘동시성’을 꼽을 수 있다. 영화는 감각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이야기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관객은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별 수 없이 객석에 붙들린 채 자리를 뜨지 않고 영화가 가진 시간과 공간을 감각하게 된다. 타 예술의 감상 시간이 감상자의 선택에 종속되고 변화한다면, 영화는 정해진 러닝타임 내에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다른 관객과 동일하게 수용하게끔 하며 창작자가 전달하고자 한 것들을 가장 직접적이고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전달한다. 관객은 주어진 단서들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상상한 것이 실현된 이미지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창작자가 의도한 장소에 감상자를 배치하고 작품을 창작자가 의도한 시간의 흐름과 배열에 따라 수용하게끔 한다. 예를 들자면, 현대 영화의 중요한 경향을 이끄는 ‘슬로우 시네마’는 이야기의 서사구조보다는 사색적인 롱테이크를 사용하며 감각에 집중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메모리아>는 스펙타클의 미혹과 빠른 컷전환이 주는 긴장감을 거부하고, 영화의 시간을 조작하고 마법같이 뛰어 넘는 대신 상영관 내의 관객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시간과 같은 템포로 일치시키며 관객을 스크린 속 시간과 공간적 체험에 초대한다. 관객은 카메라가 움직임을 좇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고스란히 남아내려고 하는 정적인 프레임 안에서 풀잎의 작은 움직임과 프레임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감각하며 어느새 영화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이 때 관객은 상상이 아닌 감각을 통해, 마들렌을 통해 옛 기억을 회상하듯 순간적인 시청각적 경험을 통해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에서 오는 새로운 충격과 여운인 푼크툼(punctum)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자면, <메모리아>에서 관객은 10분이 넘게 이어지는 롱테이크 씬에서 주인공인 제시카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잠든 에르난의 얼굴을 그녀의 시각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며 관객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경험적 사유와 푼크툼은 영화만이 제공하는 시공간의 경험을 통한 체험적 특권이다.

 이러한 특성을 토대로 영화는 때론, 이야기보다는 시간적 체험이나 공간적 체험에 중점을 두기도 한다. 영화는 시대와 시간을 붙드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이미 떠나간 시대를 살 수 있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인 인 파리>에서 이야기로만 듣던 황금시대의 파리를 체험할 수 있으며, <오만과 편견>에서는 여성들이 동경하는 낭만주의 시대로 회귀하여 더비셔(Dervyshire)의 경이로운 풍경 속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은 영화가 당시 풍경의 아카이브로 기능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영화에 거리의 이미지를 담곤 했다. 영화는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재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시간 중 하나로 흘러 잊혀질 뻔 한 순간을 붙들기도 한다. 현대를 살아가며 지나간 시대를 체험하는 방법으로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고전영화를 보는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1970년 서울의 풍경과 사회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김호선의 <아담이 눈뜰 때>에서는 당시 청춘들이 즐겨 찾던 디스코테크에 방문하며 키치 세대의 시각으로 1990년대의 한국을 체험할 수 있다. 리처드 레스터의 <하드 데이즈 나이트>(1964)는 비틀즈 멤버들의 가장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필름 속에 붙잡아 두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리운 것들도 영화를 통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기록하고 가둠으로써 잊히지 않게 하고, 후세대에게도 ‘지나오지 않은 추억’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경험은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에 집중한 형태로도 존재한다. <시네마 천국>은 ‘시네마’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매개로 한 사람의 일생을 담아낸다. 관객은 영화 내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인 영화관 안에서 한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게 된다. 영화는 빠른 시간적 흐름을 도입함으로써 2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삶을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귀속시켜 시작부터 끝까지 공간을 토대로 체험하게 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은 마치 영화관 안에서 알프레도의 시각으로 살바토레의 성장 과정을 쭉 지켜본듯한 감동과 여운을 느낀다. 살바토레의 일생은 영화 속 시네마에서 상영되는 영화들과 함께 흘러가고, 그는 영화와 함께 성장하며 마지막에 조각났던 필름 조각이 모이면서 관객이 보는 시네마 내에서의 그의 삶은 비로소 완성되며 영화의 시간은 완결된다. 시간이 장소에 얽힌 서사에 뒤따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바빌론> 역시 비슷하게 ‘할리우드’라는 영화를 상징하는 낭만적 공간을 주인공으로 하여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의 역사를 담아낸다. 관객은 그 시절 그 곳에서 한 때의 누군가의 꿈들의 쇠락과 영화의 역사가 겪는 성장통을 지켜본다. <바빌론>은 인생을 한 편의 영화로, 영화를 하룻 밤의 인생으로 구현하고 할리우드라는 영화적 공간과 그 공간이 겪어온 시간을 체험시킨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로는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이 있다. 이 영화 속에서 공간은 서사를 압도한다. 관객은 마치 스크린과 같은 시선으로 극장이라는 공간을 감각하게 된다. 이 영화 역시 <메모리아>와 같이 익스트림 슬로우 시네마의 템포를 가지고 공간을 감각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특히, ‘극장’이라는 공간은 시네필들에게 공간성 하나만으로 많은 추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푼크툼으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하다. 극장은 변사가 존재하던 무성영화 시절, 같은 것을 보며 함께 울고 웃으며 같은 감정을 공유하던 관객들이 소속감과 결속력을 느낄 수 있던 사회적 공간으로 기능했다. 현대의 관객들에게 극장은 각자 배정된 좌석에 앉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는 공적이면서도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지만, 앞에 언급했던 영화들과 <사랑은 비를 타고>, <선셋 대로>와 같은 영화들을 통해 같은 시대적, 공간적 체험을 공유했을 관객들은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해 비슷한 애정과 감정을 느낄 것이다. ‘시네마’는 그러한 공동체적인 공간이다.


꿈과 낭만 – 도피와 해방

 어두운 객석에 앉아 어둠 속에 몸을 의탁하고 시각을 스크린에 온전히 맡긴 관객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아닌 영화 속의 시간과 공간을 수용하며 ‘탈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는 ‘체험’이라는 특권을 매개로 관객을 현실과는 다른 삶에 초대한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혹은 영화를 보는 이유로 ‘러닝 타임 동안 다른 삶을 살 수 있음’을 꼽는다. 히치콕의 <이창>이나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의 은유와 같이 영화는 거대한 관음 장치로 작용한다. 관객은 영사기의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통해 타인의 삶을 훔쳐볼 기회가 주어진다. 이것은 귀속된 신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시각적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고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인간의 호기심과 열망을 충족시킨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처럼 타인의 시각으로 러닝타임 동안 타인의 삶을 살 수 있다. 현실이 단조로울수록 잠시 현실을 떠나 타인의 삶을 사는 영화적 체험이 주는 쾌감은 더욱더 강렬해진다. 영화는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실현시키기 때문이다.

 문학이 인간이 상상하는 것을 돕는다면, 영화는 그 상상을 실현한다. 상상하고 꿈꾸던 것들을 눈 앞에 보여주며 감각하게끔 한다. 조르주 멜리어스의 <달세계 여행>은 최초의 낭만주의 영화로, 인류가 상상만 해오던 꿈을 처음으로 눈 앞에 실현해낸 작품이다. 이전의 영화가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나 <열차의 도착>처럼 순간을 포착하고 기록해낸 것에 불과했다면, 멜리어스의 작품은 상상을 담았다. <달세계 여행>은 영화에 처음으로 편집 기술을 도입하여 탈현실의 경험을 선사하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이전 인간이 늘 상상해왔던 달세계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감각하게 하였다. <달세계 여행>의 탄생은 지금 영화라고 불리우는 형태의 영화가 최초로 탄생한 순간이자 영화가 인간의 꿈과 상상을 처음으로 실현시킨 순간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의 <휴고>는 그러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을 담고 최초의 영화의 탄생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휴고>에서 마법사, 인어, 여행자, 모험가 등 모두의 꿈과 상상 속에 존재하던 풍경을 영화적 체험을 통해 눈 앞으로 가져온 조르주 멜리어스는 영화를 “꿈의 발명품(the invention of dreams)”이라 칭하고, “이곳(영화 혹은 극장)에선 꿈이 실현된다.”고 말한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영화의 입을 빌려 조르주 멜리어스는 “영화가 꿈을 붙잡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the film maker georges melies was the first to realise that films had the power to capture dreams.)”이라며, 존경을 표한다.

 영화는 잠시 현실에서 떠나, 꿈과 낭만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한다. 판타지와 로맨스 장르가 늘 인기 있어 왔던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영화를 통해 관객은 현실 밖의 낭만을 추구하고, 영화 속의 사랑과 해피 엔딩을 통해 잠시나마 상상적인 행복감을 느낀다. 영화 속에서는 누구나 잘생긴 배우가 연기하는 상류층 남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상류층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의 오락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대중 매체에 하류층과 상류층의 사랑이나 상류층의 삶이 빠짐 없이 등장하는 현상 역시 이러한 이유로 설명된다. 현실이 얼마나 초라하고 지난한지와 상관 없이 영화는 지니의 요술 램프처럼 모든 것을 이루어준다.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어린 시절 상상만 하던 꿈에 가까운 공간을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눈 앞에 펼쳐진 환상을 통해 잠시나마 순수한 꿈에 젖는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영화적 체험은 잊고 지냈던 감정과 상상을 깨운다.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영화를 통해 낭만을 실현하고자 하는 관객의 이러한 바람을 투영한다. 세실리아는 영화를 보면서 지난한 현실을 잊고 낭만을 꿈꾸는 인물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같은 입장에 있다. 영화는 그런 그녀가 빠져있는 영화의 주인공 톰이 스크린 너머로 세실리아에게 말을 걸며, 영화를 통한 낭만적 상상의 실현을 전개시킨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영화를 보는 동안은 불행하지 않은 관객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는 우디앨런의 영화적 낭만의 재현을 통한 보답이다. 영화는 때론 탈현실과 상상적 세계로 이어지는 매개로 작용한다. 영화 속 상상적 세계는 현실 초월적이며,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지 않은 채 세상을 보는 창이자 도피처로 기능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에서 영화광인 세 명의 주인공들은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채 영화 속 세계에만 접속하여 꿈을 꾸듯이 살아간다. ‘시네마 테크’라는 접속의 공간을 빼앗긴 이들이 찾는 영화 속 세계는 도피의 공간이며, 혁명을 필요로 하던 이들은 현실에서 해소하지 못한 열망과 에너지의 방향을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로 돌린다. 그것이 이들이 영화라는 세계에 숨어 꿈을 꾸는 이유다. 

영화는 현실해서 해소하지 못한 욕망의 분출구이자 해방의 출구로 기능한다. 전자의 기능은 ‘꿈의 기능’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는 현실에서 이뤄지지 못한 욕망과 추동이 꿈에 투영되고 염원을 담아 재구성된다. 현실이 애달플수록 꿈만이 욕망을 완성시킬 수 있는 대안적 세계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된다.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은 현실의 대척점에 있는 이러한 꿈의 가상 세계가 영화와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2부는 완치원을 찾아 해매던 뤄홍우가 극장에 앉아 3d 안경을 착용하며 시작된다. 1부에서 결핍되고 바라던 것들이 환상적 요소들을 통해 실현되는 2부의 이야기를 꿈으로, 꿈을 영화로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라는 대안적 세계는 욕망을 해방한다. 꿈이 그러하듯 관객은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욕망을 해소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선 누리기 힘든 자유를 향유하는 자유분방한 캐릭터들이 대안적 세계에서 관객의 대리인으로서 욕망을 해방한다는 임무를 수행하곤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앤짐>의 까트린이나 장 자끄 베넥스의 <베티 블루 37.2>의 베티, 혹은 에릭 로메르 영화 속 해변의 여성 인물들 같이 말이다. 이 인물들은 사회의 억압 하에 있지도 않고, 그 무엇도 신경 쓰거나 눈치 보지 않는다.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의 마리안이나 잉마르 베리만의 <모니카와의 여름>와 같은 인물은 아예 사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원시적인 자유를 누리기도 한다. 이처럼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여성 캐릭터들이 인기를 누리는 것은, 여성 관객들이 현실에서 통제되고 억압되었던 욕망을 영화라는 대안 세계에서 해소하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레오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 역시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영화만의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이미지를 해방시키고, 꿈에서는 날 수 있듯 영화만이 꿀 수 있는 꿈을 꾼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는 밤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부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밤은 영화이고 영화는 곧 밤이다 (…) 나는 현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꿈을 꾼다. 영화를 처음 만든 뤼미에르 형제는 초기에는 영화가 단순 유행에 그칠 것이라 생각하여 영화에 대한 특허조차 취득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 유성 영화의 등장 이후 "영화가 나온지 100년이 지났을때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 나와 지금 영화랑 전혀 다른게 나와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화는 멈춰 있지 않는다. 탈현실의 공간으로, 꿈과 상상의 실현으로, 해방의 공간이자 은신처로, 낭만을 꿈꾸는 대안적 세계로. 끊임 없이 움직이며 영화는 약동한다. 인간이 꿈을 필요로 하는 한 영화는 죽지 않을 것이다.


76기 김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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