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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1. 2019

감각의 사랑

목도리에 남은 아내의 체취

감각의 사랑  

   

아침 산책길에 아내의 목도리를 빌려 두르고 나갔습니다. 오늘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꽃샘추위는 아닐 겁니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는 보통 3월 중순께나 찾아오는 게 상식입니다. 제가 꽃샘추위에 민감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매년 찾아오는 그 낯익은 자객이 능숙하게 날리는 불의의 한 칼에 늘 맥없이 쓰러지곤 했습니다. 길게는 보름씩, 그 꽃샘추위가 강요하는 감기몸살에 속수무책으로 사지를 내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례행사로 치러지던 그 악습에서 해방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꾸준한 운동으로 제 몸이 건강 체질처럼 겉모습이 바뀌면서부터였습니다(속은 여전히 약골입니다). 운동을 하면서 담배도 끊었습니다. 그러자 열서너 살 때부터 근 30여 년을 저를 괴롭히던 기억 하나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워졌습니다. 그 고통스런 기억에 대해서는 언젠가 여기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기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어릴 때 산 중턱에서 두어 시간 동안 호된 꽃샘추위에 떨었던 일이 있는데 그 이후로 딱 그때만 되면 몸살감기를 앓았습니다. 결혼 전까지는 거의 혼이 다 빠질 정도로 앓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부터는 좀 약해지기는 했습니다만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턴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기억이 슬그머니 제 곁을 떠났습니다. 얼마 전에 크게 앓았던 폐렴은 그래서 우연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사경을 헤매고, 고비를 넘기고, 또 여러 가지 검사를 받으면서(특히 지하에 있는 X레이 촬영실 딱딱한 상판 위에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면서) 문득 그때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병 수발을 들어주는 아내가 고마웠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또 섭섭한 감정도 들었습니다. 병원에 따라온 아내가 ‘죽을병도 아닌데 엄살이 좀 심한 것 같다’라는 표정을 시종 지었기 때문입니다(아마 '죽는 게 그렇게 무섭냐'라는 말도 했을 겁니다). 전들 뭐 죽는 게 꼭 두려워서 그랬겠습니까? 애비 없이 클 어린 자식들 생각에, 혼자 쓸쓸할 마누라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죠.  

   

....오랜 시간 아주 잘 잤다. 8시가 넘어 잠에서 깨었는데, 좋은 꿈이건 나쁜 꿈이건 꿈꾼 기억도 전혀 없고, 머리도 아프지 않았으며, 다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잠은 나와 어제의 만남 사이에 일종의 막 같은 것을 쳐놓았다. 오늘 아침 루치에가 내 의식에서 사라져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추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중략>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 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해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 방미경 옮김, 『농담』, 민음사, 2004, 231~232쪽) 

    

그렇죠? 모든 사랑과 증오는 ‘다가오는 방식’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 텍스트가 허용하는 인물, 사건, 배경 안에서, 그것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생산해내는 ‘경험의 구체성’ 안에서만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습니다. ‘추상적인 것들’은 그에 비해 초라합니다. 고작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들로서, 항상 후순위이고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패퇴합니다.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들과 사랑도 하고 갈등도 빚습니다. ‘구체적인 것들’이 주는 유혹과 고통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지요.     

첫 줄에서 말씀드린 '아내의 목도리' 얘기를 하고 끝을 맺겠습니다. 제가 아내의 목도리를 두르고 문밖을 나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서로 그럴 일이 없습니다. 아내나 저나 각각 자기 것에 대한 관념이 아주 투철합니다. 평생을 같이 살아도 저는 지금도 아내의 소지품이나 옷들에 대해서 아주 무심합니다. 물론 아내의 재물에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그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주 옛날 연애 시절 자주색 얼룩이 세로무늬로 들어가 있는 긴 목도리를 한 번 재미 삼아 빌려 두른 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종의 친근감 표시로 그렇게 한 번 해 본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빌려 두른 것은 그러니까 두 번째인 셈입니다. 이번에는 그 색이 보기가 좋아서 우정 빌렸습니다. 푸른색입니다. 아내가 동네 마실을 갈 때 그냥 휙 감고 나가는 가사 전용(?) 긴 털실 목도립니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잠이 덜 깬 상태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목도리를 휙 두르고 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아내가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진짜 아내가 아니라 목도리에서 나는 아내의 몸 냄새였습니다. 순간 뒤를 돌아다볼 뻔했습니다. 문득, 처음 아내의 체취를 맡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도 목도리였습니다. 누구는 향수, 누구는 비누 냄새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제가 처음 아내의 냄새를 맡은 건 그냥 생활적인 몸 냄새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무슨 식용유 냄새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아마 맞을 겁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체취를 거기서 맡았던 것 같습니다. 50년 전쯤 도시를 마치 어머니 품처럼 감싸 안은 산 중턱 어디에선가에서 속수무책으로 맞이했던 ‘3월의 한기’ 이후에 내내 비어있던 텍스트 한 구석을 그렇게 채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빈 곳을 메꾸는 것들, 채워져 의미가 되는 것들은 늘상 그렇게 구체적인 어떤 것들이었습니다. 내 감각에 포착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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