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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브륄레 Feb 04. 2021

님아 그 오리 더 만들어주오

하얀 세상을 지배하는 오리들

올해는 눈이 계속 온다. 펑펑 내린다.

처음엔 눈이 온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래서 다음에도 눈이 올까 기대하며 일기예보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펑펑 내리는 눈에 설레기도 하고, 온통 하얀 세상을 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런데 요새는 눈보다 더 기다려지는 게 있다. 눈사람이다. 눈사람이라기보다 눈 오리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어디선가 오리 집게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더니 눈이 오는 날마다 온 세상을 오리 왕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너도나도 구입하게 된 오리 집게. 품귀현상도 일어나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지.


어제도 눈이 내렸다.

쉴 새 없이 내리던 눈은 세상을 또다시 하얗게 물들였다. 집에 가는 길에 벌써부터 대왕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이 보였다. 신나서 눈 뭉치를 굴리는 아이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성인들도 너나 할 거 없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아이가 보였다.

집 가는 길.

눈 내린 지 몇 시간 안됐는데, 벌써 개성 넘치는 눈사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다른 동네엔 많았다던데 우리 동네에선 오리를 거의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괜히 반가웠다. 유명 스타를 만난 기분이랄까. 저 멀리 오리 집게를 갖고 눈 오리를 만드는 아이들이 보였다. 많이 만들어주렴 아이들아.


귀여운 자태를 뽐내는 오리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군더더기 없는 자태를 만져보니 매끈했다. 눈 뭉치가 이렇게 매끄러웠던가. 길가에 눈을 모아 똑같이 눈 뭉치를 만들어봤다. 꾹꾹 눌러 담으면 이렇게 매끈해지는구나. 오랜만에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매끈한 느낌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하루 종일 눈 뭉치를 갖고 놀 셈이었다. 그럴 순 없는지라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돌아서서 몇 걸음 가니 이번엔 웬 나무에 오리가 있었다. 뚱딴지같은 장소에 있는 오리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게 왜 여깄지!!" 하하. 누가 나무에 오리를 달 생각을 했을까.

오리 왕국에 초대되니 이런 광경도 보는구나.

또 돌아서서 몇 걸음 가니까 웬 대왕 오리가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리 왕인가.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와 저걸 어떻게 만들었담!!!?"

눈이 조금 지저분해서 그렇지 멀리서 봐도 오리였다. 사진엔 안 보이지만 부리도 있었다. 완벽한 오리였다.

진귀한 광경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만 보기 아까운 대왕 오린데, 사진이라도 남겨두자'해서 같이 사진도 찍었다.

대왕 눈사람이 아닌 대왕 오리를 만들 생각을 한 것도 웃기고, 실제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너무 귀여웠다. 귀여운 발상이다. 누가 이렇게 오리에 중독되었을까. 덕분에 정말 오리 왕국에 초대된 기분이었다.

번외로 올라프도 있었다. 눈이 내리면 세상이 왕국이 되나 보다. 겨울 왕국. 눈이 와야지만 열리는 세상.

그 세상을 보고 있으면 흐뭇해진다. 그 세상을 열심히 굴려서 만들었을 사람들도 귀엽고, 그렇게 탄생한 세상도 귀엽다. 나이를 불문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만지고 있는 그 모습이 참 귀엽다. 참 좋다.

항상 이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은 눈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이런 것들 때문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거리인데, 눈사람, 눈 오리 하나 보인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게 마법 같다. 어떤 귀여운 사람이 저걸 만들었을까. 저 귀여운 걸 만들려고 노력한 땀들조차 날 흐뭇하게 만든다. 특히나 큰 눈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저 큰 걸 만들려고 얼마나 열심히 눈 뭉치를 굴려댔을까.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얼마나 뿌듯했을까.

누군가의 땀과 노력, 그리고 기대감과 행복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이 좋다.


또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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