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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May 21. 2023

사랑에 관한 여러 단상들

삶 사람 사랑

1.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나래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법정 / <무소유>)


그렇다. 완전한 이해란, 부처 뺨치는 해탈자가 아닌 이상 수십 년에 걸친 경험과 가치관으로 형성된 자의식을 벗어나 오롯한 타인의 시선으로 사고하는, 그러니까 자아에서 타아(?)로 사고작용의 그릇을 옮기는 경지에까지 이르기란 당최 불가능하다.


그저 <공감>할 뿐이다. 그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그럼에도 어떤 현상이나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춰 선 안 될 것이다. 쳇바퀴 같은 일과에도 자신만의 목적과 당위성을 찾듯이, 모든 삶과 죽음, 시작과 종결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니까.


초월해야만 한다. 그래야 고이지 않고 흐를 수 있다. 자아의 좁은 우물을 벗어날 수 있다. 이다음으로, 피아를 향해.



2.


<구원>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벗어남>과 <안식>이라면, 사랑은 구원과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교류성, 즉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피차 상호적이냐 아니냐의 차이뿐이지 않을까.



3.


동일인물임에도 상황에 따라 사랑은 구속이 되기도, 또는 방치가 되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받아들이는 단단한 믿음과 애정의 지속은 결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닌 상당한 품을 들여야 한다.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노력 또한 관계의 본질을 변질시킨다.


결국 사랑은 과함과 모자람의 사이에서 사리분별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균형을 잘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실제 줄타기는 신체적 움직임으로 감각을 통해 직접 느낄 수 있지만 사랑은 그렇지도 않아서 휴화산처럼 폭발직전까지 전조현상을 놓치기 십상이다.


결국은 제때, 적당히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쟁취도 아니고 노동의 대가처럼 상대적이지도 않다. 사랑이란 명목으로 나태한 맹목이 아닌, 피아 모두가 주체성과 분별을 갖춘 서로의 순기능이 되어야 진정성을 갖춘다.



4.


어떤 면에선 사랑과 재산의 기본 속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존의 필수요소라는 점에선 공통적이나, 가진 정도와 획득 능력은 공평하지 않다. 가질수록 불어나고 없을수록 궁상맞다. 점차 우열이 분명해지니 고작 둘 뿐인 사이에서도 승패와 계급이 가려지기도 한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타인의 것이 많고 적은 정도를 직감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유사하다.


<자기 사랑은 자기가 만든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줄 줄도 안다>는 말은 새삼 낙인처럼 느껴진다. 나 같은 사람은 마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의미처럼 느껴져서.



5.


공허와 결핍은 사랑으로만 충족할 순 없다. 바른 보행자세를 갖춰야 걸을 수 있듯이 삶도 사람도 사랑도 나와의 모든 관계성에는 바로 선 자세, 나를 중심으로 한 주체의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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