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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Mar 02. 2021

3월의 겨울왕국

눈 쌓인 풍경을 둘러싼 이런저런 단상.

    개학을 하루 앞둔 어제 오후, 그리 미미하지도 거세지도 않은 애매한 빗줄기를 뚫고 학교 준비물을 구입하러 9살 난 첫째 연이와의 외출을 강행했다. 무심결에 바라본 귀가 버스 창문에는 뿌연 시야 위로 선명한 물방울 무리가 다채롭게 반짝였다. 연이와 함께 보석 같다느니 밤하늘의 별빛 같다느니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면서도 왜 주르륵 흐르지 않고 송송이 맺혔을지 궁금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 이유가 드러났다. 좀 전까지 흩날리던 빗줄기가 눈발로 변해있는 게 아닌가. 3월 시작부터 눈이라니.



    비가 눈으로 변신하는 게 신기하면서 신이 난 연이는 슬쩍 마스크를 내려 강아지처럼 입을 헤벌리고 혀를 빼꼼 내민다. 눈 먹지 말라며 타박하는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사남매가 등교하고 등원하느라 한창 바쁠 때에 미끄럼도 보태질 내일 아침이 걱정은 되지만 아직은, 아직은 눈 내리는 풍경이 예쁘다. 물론 눈으로만 감상할 때 한해서.


    연이와 함께 무거운 짐을 가득 안고 집까지 거북이 행진을 하면서 문득, 지난주에 직장 동료에게 무심코 던진 한 마디를 떠올렸다. "이러다 갑자기 추워져서 3월의 눈이 내릴지 몰라요." 화창하다 못해 땀을 뻘뻘 흘릴 만큼 더워진 날씨를 두고서 뱉은 말이었다. 실로 요즘 날씨가 변덕이 죽 끓듯 하니 아주 그릇된 지론은 아니었대도, 괜스레 말이 씨가 된 느낌이다.


    "엄마 저기 봐, 완전 겨울왕국이야!"


    다음 날인 오늘 아침. 연이의 감탄에도 오랜만에 정신없이 등교하느라 눈에 들지도 않던 풍경은 학교 정문에 다다르니 그제야 보였다. 끝무렵이 닥친 겨울의 치기일까. 꽃봉오리를 올리려던 가지와 한갓진 공터마다 새하얀 심술이 쌓였다. 연이 말대로 봄날의 겨울왕국이었다.


    10년 전에 관람했던 <3월의 눈>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사실 3월이 아니어도 왕왕 되새기지만 제목 그대로 3월에 눈이 내리니 자연스레 연관 지어지는 것이다. 용산에 있는 백성희 장민호 극장에서 두 분 선생님의 캐스트는 아쉽게도 진작 매진됐고 오영수 선생님과 박혜진 선생님의 공연을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창호지, 대사 한 마디 없이 눈빛만으로도 슬펐던 배우의 아우라, 그리고 극 끝무렵에 내리는 3월의 눈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새하얀 3월의 눈으로 둘러싸인 상생과 상실이 공존했던, 난생 처음 관람 내내 울었던 공연이었다.


이미지 출처 - 서울신문 | ‘3월의 눈’ 봄 눈처럼 처연한 노부부의 인생 (안동환 기자, 2018)


    신학기 준비물이 어찌나 많던지 내가 들기도 벅찬 빵빵한 가방을 메고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 의 뒷모습은 흡사 가방이 걸어 다니는 모양새였다. 내년이면 둘째 하랑 손잡고 나란히 들어가겠구나. 연이가 시야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넋 놓고 서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남편은 이제 그만 연이 혼자서 등교하게끔 독려하라지만 아직은 등하굣길마다 곁을 지키고 싶다. 내가 부모로서 애들한테 해준 게 얼마나 된다고 이마저도 안 하나 싶어서. 연이를 보내고 데려오는 동안에 말없이 눈에 담는 풍경마다 예뻐서. 결국은 내 욕심, 또 욕심이었다.


    등교와 달리 내리막인 귀갓길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 소나무고 벚나무고 아파트고 메탈휀스고 눈은 가리지 않고 내려앉았다. 3월 풍경이 겹겹이 두른 하얀 옷을 자랑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비질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겹쳐울렸다. 열선이 깔린 차도와 달리 제설제가 안 뿌려진 경사진 인도는 걸음마다 미끄럽지만, 종종 지나는 사람마다 휴대폰 속에 눈 쌓인 풍경을 담아내기 바빴다.



    한철 피고 지는 꽃이나 한철 물들고 지는 단풍과는 다르게, 어쩌다 피는 눈꽃은 흔적도 없이 말간 햇볕에 녹아 사라질 운명이라 해마다 찾아와도 생경하다.  또한 휴대폰을 들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순간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해본다. 3월의 시작이 순백색 것도 나쁘지 않다. 역시  쌓인 풍경은 예뻤으니까. 이런저런 상념에 둘러싸인 상생과 상실을 넘나드는 계절 속을 말없이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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