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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글이 써졌어

by 민창

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죽음은 뭘까요. 이런 질문들은 '여름이 왜 오는지' 묻거나 '겨울 전나무가 왜 아름다운지' 묻는 것 과 비슷합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고 반복만 있어요. 그러나 이 반복은 집요해서 아름다워요. 묻고 또 묻고 되묻고 묻고 다시 또 묻고 그렇게 묻다 보니 거대한 능과 총이 서겠죠. 저는 지금 다시 묻습니다. 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당신은 뭐예요. 내 안에 왜 이리 밝은 것들이 가득한가요.

- 고명재 산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중에서


1.

분명 봄이 온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눈을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쓴 오늘이 정녕 3월인지요. 3월은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아도 주변 지인들이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맞이하는 거 같다. 내겐 이젠 너무 익숙한 학교를 간다. 설렘보다는 피곤함, 긴장보다는 귀찮음 그래도, 눈을 맞으면서 개강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눈이 온 오늘 날씨 덕분에 개강하며 '당황'이라는 감정을 만났다. 학업의 마지막 학기와 새로운 일을 같이 하게 된 25년도 3월. 마지막과 시작을 함께하다 보니 분주함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학교 동기들과 후배 그리고 선배들, 방학의 안부를 묻고 밥을 먹자고 이야기한다. 빈 말이라도 밥을 먹자는 인사는 늘 반갑다. 그 말에는 빈 말이라도 함께라는 온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 먹을지는 모르지만 "그래, 밥 먹자"라고 답변한다. 눈이 오는 3월의 추운 날씨에 얼어있고 분주한 마음을 짧은 대화로 조금이나마 온기를 불어넣는다.


2.

글을 쓰고 모으는 행위를 시작한 지 햇수로 5년이 되어가고 있다. 참 많이 끄적이고, 많은 공책을 만났고, 수 백개의 글을 컴퓨터에 저장했다. 글쓰기의 매력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것과 부족한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거다. 처음 만들었던 '무색'이라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을 남겼었다.


"서툴렀기에 솔직했고, 처음이었기에 진솔했습니다. 언젠가 이 흔적이 위로가 되길."


여전히 글을 쓰면 내 서툰 모습이 보인다. 너무 많은 부사가 들어간 문장들, 멋있는 문장이 없는 글, 한 참 부족한 내 글 실력. 그래도 감사한 건 매순 간 서툴러서 글을 쓸 때마다 처음인 마음으로 글을 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났기에 변한 게 있다면 어느덧 이런 서툰 내 모습을 스스로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 어떤 힘이 생기는지를 알게 됐다는 거다. 나를 사랑하게 되니 계절을 사랑하게 됐고, 내일을 걱정하던 내가 오늘을 사랑하게 됐다. 여전히 내 모습 중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봤을 때 부끄럽고 창피했는데 이젠 괜찮다. 사랑은 마음을 쓰는 사람에게 주는 성취라고 믿기에 지금처럼만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


3.

당신의 글을 응원하고 싶다. 아직, 글을 쓰지 못했다면 앞으로 쓰일 당신의 글을 응원하고 싶다. 글을 써야겠다는 결단이 어떤 용기인지 조금이나마 알기에 그 결단을 응원하고 싶다. 쓰인 글을 읽으며 부족한 내 모습을 확인하는 행위가 어떤 용기인지 알기에 그 행위를 응원하고 싶다. 글을 쓰기 위해 내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에 그 시간을 응원하고 싶다.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내 못난 모습과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살아간다는 건 조금이나마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4.

교회에는 불교처럼 불상 같은 상징되는 존재의 상像을 놓지 않는다. 무엇이든 하나님 외에 우상화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존재. 낮은 존재이기에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존재. 나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그렇게 생각한다. 십자가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랑을 상징한다. 교회 예배당 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두는 건 숭배 보단 기억하라는 의미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요정이 아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와 함께하는 존재이시다. 학교 개강예배가 끝나고 채플실 위해 눈을 맞고 있는 십자가를 올려다봤다. 정말 눈이 오겠냐고 의심하면서 우산을 안 챙긴 나와 같은 처지로 눈에 푹 젖어버린 십자가.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날씨에 함께 하는 것. 함께라는 단어에 얼마나 깊은 사랑이 있는지를 안다. 내가 배운 사랑은 그런 모습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시가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이 질문들에 답이 아닌 반복만 있음을 공감한다. 나는 그 반복 안에서 지금까지 글을 썼다. 찾아오는 계절들의 제각각 다른 냄새를 맡으며 내 옆에 늘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글을 모았다. 감사한 건 나는 늘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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