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글이 써졌어
어려서부터 물건에 마음을 많이 쏟는 편이었다. 다섯 살 무렵, 평일에 엄마를 따라 교회에 갈 때마다 챙기던 레고 가방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함께였고, 결국 교회의 작은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누나에게 선물 받은 라코스테 지갑은 27살 생일을 맞아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내 곁을 지켰고, 24살에 선물 받은 곰 캐릭터 에어팟 케이스는 지금도 여전히 사용 중이다. 때가 타면 씻고, 낡아지면 고쳐가면서, 나는 그렇게 물건들과 천천히 이별한다. '실증'이라는 이유로 물건을 바꾸는 건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물건과의 진정한 이별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2025년 1학기가 시작되면 바빠질 내 일상을 생각하니 그 전에 쉼을 주고 싶었다. 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제주도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충분히 쉬고 돌아가는 날, 공항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일행들과 함께 주변 카페나 둘러볼 생각에 무거운 짐을 맡기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제주공항 1층에서 하는 '픽사 팝업스토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토이스토리', 인사이드 아웃, 엘리멘탈, 디즈니 공주들까지 다양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굿즈들이 가득했다. 예상치 못한 소비는 가끔 운명처럼 다가오는 법이다. 이런 순간에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토이스토리 제시 스티커? 제시 굿즈는 보기 힘든데… 이걸 안 사면 비행기 안에서도, 김포공항에 도착해서도, 집에 돌아가서도 내내 후회할 거야."
"제시 키링? 세상에 제시 키링이 또 있을까? 여기서 안 사면 평생 후회하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운명이라고 확신하며 장바구니를 채워갔다. 그 와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뜻밖에도 토이스토리가 아닌 엘리멘탈의 '웨이드 그립톡'이었다.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이 나와 웨이드가 닮았다고 자주 얘기했던 탓일까. 웨이드라는 캐릭터에 정이 갔다. 사실 그립톡을 써볼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라 망설임 없이 그립톡을 구매하고, 신중히 투명 케이스에 붙였다. 투명 케이스 위로 귀엽게 웃고 있는 웨이드의 얼굴이 꽤 마음에 들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현실이 머리를 스쳤다.
'아, 나 보조배터리 맥세이프인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자석 그립톡이라는 존재와, 내가 산 옆에 자석 그립톡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붙였는데..." "충전은 어떻게 하지...?" "뭐, 케이스 빼고 충전하면 되지 않을까…"
맥세이프의 존재 이유가 '편리함'이란 걸 생각하면 내 선택은 이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애정을 담아 붙여버린 웨이드 얼굴을 볼 때마다 선택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케이스를 끼고 빼면서 충전하는 어설픈 일상이 반복됐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선배 형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좋아하는 사람이나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는 그러지 마라." "왜... 별로야...?" "응, 너무 별로야."
별로라는 말을 듣는 것도 점점 많아지고, 불편함도 커졌다. 결국 나는 실증이란 단어를 핑계 삼아 자석 그립톡과 맥세이프 케이스를 주문하기로 했다. 가장 무난하고 귀여운 디자인을 찾기 위해 포털에 '나무 자석 그립톡'을 검색해 가장 인기가 많은 상품을 주문했다. 다음 날 도착한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는데, 어라? 나무 줄기가 왜 초록색이지? 자세히 보니 킹받는 표정의 초록색 덩어리… 주문내역을 다시 확인하자 예상하지 못한 진실이 드러났다.
브로콜리 그립톡.
나는 분명 나무라고 검색했는데 넌 왜 브로콜리였던 거니…?
최소 삼 년은 함께하려 했지만, 친구야 미안하다. 정이 가지 않는다. 너는 나무였어야만 했다. 그래도 나라도 너를 나무로 봐줄게. 하지만 새벽에 갑자기 잠이 깨서 너를 바라볼 때마다 초록빛 브로콜리인 네 정체성을 받아들이기엔 내 마음의 준비가 부족하다. 너는 나무였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