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긴장감과 잘할 수 있다는 최면으로 가득한 이직 첫날
띠링 메신저가 울린다.
"김 차장님, 잠깐 시간 되세요?"
나를 회의실로 이끈 선임은 약 20분 동안 대략적인 팀 소개와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를 해주었다.
나의 첫 이직,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싶었던 나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선임이 하는 말을 열심히도 받아 적는다.
들으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개선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포인트로 느껴지면 따로 메모까지 해두느라 정신없다.
어느 정도의 업무소개가 마무리되고 선임이 던진 한마디.
"음... 그리고 이건 김 차장님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인데요."
오. 제일 중요한 처세술을 위한 꿀팁인가? 앞서 소개받은 업무 내용들이 한순간 날아가 버린다. 지금부터가 진짜 진짜 중요한 내용이다.
바짝 긴장을 하고 화자가 말하는 톤이나 숨은 뜻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최대한 귀와 눈을 크게 뜬다.
"
우리 팀장님이 조금 특이하세요.
굉장히 선 넘는 것을 싫어하시고, 팀원이 의견 제시하는 것도 안 좋아하시고, 본인의 의견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싫어하십니다. 혼자 계시는 것을 좋아하고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번 눈밖에 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려우니 조심 또 조심하세요. 마음에 안 드는 팀원이 생기면 명분을 만들어서 팀에서 쫓아버려요.
"
정신없는 업무 소개와 팀장님에 대한 꿀팁까지 얻은 알찬 시간이었다.
오늘 회의에서 들은 내용을 완벽히 다운로드했다.
훗 나는 역시 적응력 갑이다.
자리로 돌아와 까먹을세라 노트에 쓴다.
"팀장님. 주의. 예민하심. 선 넘지 말기. 의견 제시 금지. 혼자두기. 눈 밖에 나지 않게 조심하기"
점심시간 30분 전, 다시 울리는 메신저.
띠링.
"김 차장님, 점심 약속 있으세요? 없으시면 저희랑 드실래요?"
첫인상부터 어쩐지 동생같이 친근하고 친절한 박대리의 점심 제안.
마주 앉자마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박대리와 이 과장이 물어본다.
"저희... 팀장님 어떤 것 같으세요?"
그동안의 회사생활을 통해 겪은 다른 팀장님들과 비교해서 장점으로 느껴지는 부분을 짜내어 말해본다.
나 : 오... 글쎄요? 아직 2일 차 밖에 안 돼서. 그래도 합리적이시고 쿨하시고 좋으신 것 같은데요?
이 과장, 박대리 : 아 아직 김 차장님이 덜 겪어보셔서 그러실 수 있죠. (하하하)
박대리 : 저희 팀장님 굉장히 무서우신 분이에요. 앞에서는 호호 웃으시다가 순식간에 돌변하십니다.
이 과장 : 맞아. 이상한 거 자꾸 시키고 특히 보고서에 자부심이 있으셔서 김 차장님이 조금 부담되겠어요.
우리 팀은요, 우리 팀장님은요, 우리 회사는요,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팀장님 포함 팀 주변에 대해 또 다른 정보를 쏟아내주는 고마운 팀원들이다.
팀원들을 잘 만난 것 같다. 다행이다.
고마운 점심시간을 보낸 뒤 노트에 추가로 적는다.
"팀장님. 보고서. 돌변."
팀원들의 팀 생활 꿀팁(?)이 하나하나 모여 데이터베이스화가 될 때마다 왠지 더 막막해지고 어떻게 슬기롭게 이직생활을 해내야 할지 더 흐려지는 기분이다.
회의를 할 때, 보고를 할 때, 업무를 할 때마다 팀원들이 알려준 꿀팁(?)을 새겨가며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신경 써서 대처하고 있다. 그런데 어쩐지 그럴 때마다 잘해나가고 있다 보다는 예상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지는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이상하다. 꿀팁이었는데.
나는 내 의견이 있으면 말해야 하고, 디렉션이나 공유한 내용이 명확지 않으면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 성격이다.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문득문득 나오는 나의 성격. 팀원들의 꿀팁을 참고해서 조심하려고 했으나 자꾸만 튀어나왔다.
"김 차장님, 지난번 회의에서 솔직한 의견을 말해줘서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든든하네요. 고마워요."
음? 이상하다. 분명 의견을 내는 것을 싫어한다고들 했었는데. 왜 이렇게 말씀하시지? 혹시 마음에 안 드셨는데 돌려서 말씀하시는 걸까?
"김 차장님, K대학교와 하는 산학과제도 김 차장님이 같이 도와줬으면 해요. 아무래도 손대리가 주니어다 보니 산학과제를 진행한 경험이 없어서, 옆에서 같이 하면서 알려주세요."
내가 입사하면서 신규 업무와 기존 팀원들이 하는 업무들도 자꾸 나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 솔직히 버겁다. 하지만 군말 없이 다 해내는 모습을 보여드려야지. 눈 밖에 나면 안 되니까.
"아무래도 김 차장님에게 계속 업무를 주시는 거보니, 팀장님만의 테스트 단계인 것 같아요."
팀원들의 꿀팁을 참고해 보면, 나는 지금 테스트당하는 중이다. 이겨내야지.
아. 근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흠... 토 달면 안 되니까 참아보자.
근데 이거 진짜 맞아? 좀 너무 하시는데?
나 : "팀장님, 아무래도 이건 저 혼자 기획하고 수행하기에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업무는 팀원들끼리 나눠서 하면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팀장님 : "김 차장님 생각에는 김 차장님에게만 업무를 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김 차장님에게만 이 업무를 주는 이유가 있어요. 김 차장님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다른 팀원들은 이 업무를 내가 만족할 만큼 수행할 수가 없어요. 김 차장님을 믿으니까 이 업무도 부탁드리는 거예요. 힘들면 우선순위화를 해서 이 업무부터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어라. 나를 테스트 중이라고들 했는데, 나를 믿으셔서 주시는 거라고?
이상하다. 팀원들의 꿀팁이. 나를 배신할리 없는데?
퇴사 면담을 하고, 퇴사를 하고,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첫 이직 때 다른 사람의 선입견을 너무 많이 참고했었던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타인의 처세술 꿀팁을 참고할 필요는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선입견을 참고할 때에는 그 적절함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겪는 상황이 모두가 다르고, 그때그때 상대방의 상황도 다르다. 나의 기준이 다르고, 타인의 기준도 다르다. 타인의 생각을 그대로 흡수하고 내 생각에 투영해서 상대를 대하고 바라보고 또 그 과정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의문적인 상황들. 그리고 스스로 쳤던 장애물과 벽들.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어쩌면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순간이라면, 내가 타인이 만든 선입견과 벽에 휘둘려 나 스스로를 그 상황 속에 고립시켜 놓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길 바란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래 그럴 거야.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퇴사라는 큰 결정을 하기 전에 내가 직접 겪어 보고 부딪혀보고 느끼는 과정이 꼭 필요한 것 같다.
두 번째 퇴사를 하면서 나는 다시 다짐한다.
내가 직접 겪어 보고 판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