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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관 옆자리 Mar 26. 2021

8화 다시 제자리로

침몰하는 배의 무책임한 선장

차가워진 바람에 옷깃을 세웠다. 문득 그를 처음 본 날도 이렇게 추웠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를 먼발치서 쳐다보던 나의 4년 전 겨울처럼 올해 나의 겨울은 서럽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설움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기로 결심했다. 지금도 나는 문득 아프고, 문득 서럽다. 그러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21년도에는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비는 사람들의 기도 속에 나는 코로나와 더불어 그도 내 마음속에서 종식되기를 빌었다. 


그를 놓아야 함을 이제 깨달았지만 마음은 아직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니 나는 아직도 새벽에 잠을 깬다. 덕분에 새해를 새벽형 인간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출근 전에 하루 2시간 시간이 생겼다. 처음엔 요가를 해볼까 시도했지만 일어나자마자 하는 운동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퇴근 후에는 기타를 쳤다. 너와 보낸 시간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내 안에 감정들을 악보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고, 내 기억들은 모니터 안으로 옮겨놓았다.


나는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 달도 안 되어서 나를 만난 그를 보며, 그가 연애 사이의 기간이 짧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헤어져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한 순간에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그 느낌. 연애가 끝났을 뿐인데 마치 인생이 끝난 것 마냥 슬퍼하는 사람들, 몇 번의 헤어짐을 경험했어도 연애가 끝났을 때 자신 안에 중요한 무언가도 상실되는 느낌은 적응하기 어렵다. 그러니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무서워 침몰하는 배에서 빠르게 다른 배로 넘어갔을 뿐이라고.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한다는 말처럼 연애의 부재를 연애로 메꿨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침몰하는 배를 방치한 무책임한 선장일 뿐이었다. 연애는 둘이 조종하는 배인데 그는 언제나 승객인 것처럼 굴었다. 나는 연애를 하면서도 가끔 외로웠으니 이 외로움은 그가 선장 노릇을 해야 할 책임을 유기하면서 비롯됐다. 작가인 앤드류 솔로몬은 ‘한낮의 우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기제이다.’. 우리의 이별 후 슬픔은 나의 몫이었으니 나는 이 슬픔 뒤에 다시 사랑을 할 것이다. 그러나 슬퍼할 틈도 없었던 너는 또 다시 공허하고 편한 친구 같은 애인을 만들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는 나를 만나는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가 사랑이 아닌 얕은 관계만 맺었었다는 걸 안다. 그가 너무나도 밉지만, 그래도 그가 이제는 부재를 절망으로 느끼는 사람을 찾길 바란다. 그래서 그 사람과는 잔소리도 하고 책임감도 갖는 그런 관계를 만들길 바란다. 늦었지만 이 말은 전여자친구가 아닌 친구로서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의 연인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게 잔소리를 했던 좋은 친구였으니까. 이 말을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다.


그를 사랑했던 모든 순간은 나에게 아름다웠다. 그와 함께였지만 오롯이 나한테만 해당되는 이 감정은, 그래서 나에게만 아름다울 것이다. 삼 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는데 나는 지독히도 사랑을 믿는 여자였다. 다음번 사람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또 다시 내 삶을 다 던져 사랑할 것이다. 그러니 다음 사람이 온다면 그 사람과는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지낼 것이다. 장범준씨의 노래 가사처럼 ‘그다지 멀지도 않고, 그다지 가깝지도 않게’ 말이다. 그렇게 평생에 걸쳐 천천히 내 생을 조금씩 떼어 주리라.


나는 그를 잊지 못하고 영원히 내가 제자리에 있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가 잘못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후회 없이 사랑한 사람도, 모든 상처를 끌어안은 것도 나다. 그러니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 있을 사람 또한 나다. 시간이 지나도 너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고 너와 함께한 추억이 너무도 많으니. 억지로 널 지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네가 떠올라도 담담하게 지나갈 정도로 내가 성숙해질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fr08vjz3ao

그 남자를 생각하며 만든 마지막 곡, 제자리


https://youtu.be/LdAiX16UH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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