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볕에 누워 자던 고양아 네가 매우 부럽구나
예전에 가파도에 가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과 제주에 놀러 와서 자전거를 탈만한 곳이 어디 있나 찾다가 가파도까지 찾아보게 되었는데, 배를 타고 10분 정도 들어가면 자전거를 대여해서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예쁜 섬이었고, 좋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올해는 일 년간 제주에 있으니 적어도 가파도 청보리축제에는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비가 오거나 궂은날들을 제외하고 적당한 날을 정해서 배편을 예약하려고 사이트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내가 잘못된 사이트를 들어간 건지 표가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일주일 내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폰에 어플을 다운받아서 다시 찾아보았다. 그런데 역시나 표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다른 날들이 날씨가 안 좋아서 이때 딱 가야 하는데 표가 없다니.. 절망스러웠다. 가기로 계획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못 가게 되다니. 기분도 착 가라앉았다.
전에 아무 어려움 없이 가봤던 섬이라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청보리축제 때는 이렇구나. 표가 없는 거구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찬찬히 검색해 보니 현장에 가면 선착순으로 표가 있긴 하다고 해서, 그래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일찍 자고 내일 무조건 현장으로 가봐야겠다 하고 러닝 준비물을 챙겨서 일찍 자기로 했다.
다음날, 4월 9일 화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 6시 반에 나와서 운진항으로 출발.
항에 도착하니 내 앞에는 네 명이 서있었고 곧 현장발권을 시작해서 결국 티켓팅을 성공했다.
나는 8시 40분 첫 배를 타고 들어가서 10시 50분에 나오는 왕복승선권으로 끊었다.
일찍 가서 줄만 서면 되는 거였으면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갈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현장발권이 얼마나 있는지 대기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여서 도박 같은 마음으로 출발했던 것이었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작은 모험에 성공해서 너무 신났고 설레었다.
혼자서 배를 타고 들어갔지만, 외롭지 않았다. 두근두근 재미있었다.
날씨는 어떨지 청보리는 많이 있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가파도는 한 바퀴에 4K 정도가 되는 완만한 작은 섬이라서 자전거를 많이들 타는데, 자전거를 타기 좋다는 건 달리기에도 좋다는 뜻이다.
가파도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들러서 모자에 고프로를 올리고 전원을 켰다.
그리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스트레칭하면서 슬슬 걸어 나갔다. 나랑 같은 배를 타고 들어온 사람들이 우르르 여기저기 몰려있었다. 나는 그 무리를 뚫고 달려 나갔다. 이상하게들 보겠지. 외로운 러너다. 그렇지만 마음은 풍요로운 러너다.
이제 나의 러닝 유튜브에는 가파도의 청보리런이 올라갈 예정이다.
그런데 가파도 둘레 한 바퀴를 달리는 동안에는 당연하게도 청보리가 없어서, 한 바퀴 돌고 나서 섬을 가로질러서 청보리 스폿으로 가봐야겠다 하고 달리면서 촬영동선을 계획했다.
"저..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그런데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어떤 아주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음.. 나 지금 러닝 영상 촬영 중인데.. 잡혀버렸네.. 편집하지 뭐
"아 뭐 찍고 계시는구나"
"괜찮아요. 찍어드릴게요" (찰칵)
찍고 가려는 순간, 나도 찍어주시겠다는 것이다. 내 유튜브에는 내가 안 나오는 콘셉트인데..
길게 설명하기도 그렇고.. 그냥 감사하다고 하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형광핑크색 재킷을 입고 있어서, 옷이 너무 화려하고 예쁘다고 하셨던가 아무튼 덕분에 사진을 한 장 얻었고, 나중에 유튜브 편집할 때 기념으로 내 사진도 한편에 1초 정도 같이 올렸다.
사실 내가 등장하거나 목소리가 나오면 부끄러울 것 같아서 달리는 배경만 나오기도 하는 거였는데, 내가 사진을 올려도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구독자도 별로 없고, 심지어 남편도 재미없어서 끝까지 보기 힘들다고 하는 정도이니 앞으로 마음 놓고(?) 내가 나오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무 말도 없고, 음악도 안 나오고, 오로지 달리는 제주도 배경만 나오니 재미가 없긴 하지. 이해한다.
그래도 나중에 서울로 돌아가면, 실내에서 러닝머신을 달리면서도 제주를 그리워하며 내가 볼 예정이라서 1년 동안은 하기로 작정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청보리밭을 찾아서 섬을 가로질러갔다.
영상에 예쁘게 잘 담길지 모르겠지만 아름답고 청량하긴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살던 고향 군산에서는 여기저기 논에 푸릇푸릇한 벼들이 많았는데, 가파도의 청보리는 좀 과장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가파도에는 청보리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바다도 있고, 풍차도 있고,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하고, 제주 도니까 그만큼 특색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구석구석 참 예쁘고 아기자기 잘 꾸며놓았다.
청보리 러닝까지 촬영을 마치고 아담한 카페에서 청보리미숫가루를 한잔 마시는 중 한가하게 가파도의 따뜻한 볕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참 부러웠다.
나는 10시 50분 배를 타려면 서둘러서 또 달려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