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omforter
Jun 19. 2022
얼마 전, 미래 사고(future thinking)에 관해 연구하는 후배의 프로젝트를 도와주었다. 연구 참여자들은 미래에 벌어질 것 같은 부정적인 사건을 가급적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해결책에 대해서도 가급적 구체적으로 생각해서 쓰라는 지시를 받는다. 연구 주제의 핵심은 걱정이 많고 불안한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사고의 구체성(concreteness)이 떨어지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부정적이고 끔찍한 사건에 대해 많이 생각할 테니, 부정적인 생각을 구체적으로 많이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이다. 걱정이 많고 불안한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막연하고 모호하게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지만, 그저 막연히 무언가 내 예상 밖의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신기하게도 걱정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반복할수록, 걱정의 내용이 점점 더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추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걱정을 하면 할수록, 뿌연 안갯속을 정처 없이 헤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이는 불안을 점점 더 가중시킨다.
이들에게 삶은 위험한 퀘스트가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통곡의 게임이다. 이 게임에 자발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적도 없건만, 태어났더니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고, 멈출 수도 없다. 마음을 졸이고 한 고비 넘기면, 또 한 고비,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유령을 피하기 위해, 눈을 반쯤 가리고 잔뜩 긴장한 채 안갯속을 헤매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머릿속에 달라붙은 '유령이 나오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은 구체적인 실체가 결여된 의미론적 문장으로만 존재한다. '유령은 무서워', '나는 유령을 이겨 낼만큼 강하지 못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자신과 세상을 규정하는 말, 말, 말... 이 말들에 둘러싸여 좀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사실 이들이 이 실체 없는 걱정을 지속하는 이유는, 걱정을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하는 실체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령이 나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의 인식체계는 실제 유령과 결코 대면하지 않는다.
유령이 나오면 어떡할 건데?
유령은 어디쯤 있을 것 같은데?
유령은 어떻게 생겼을 것 같은데?
유령이 어떤 해를 가할 것 같은데?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데?
내가 가진 무기는 무엇이지?
유령이 아니라 친구일 수도 있잖아?
어떻게 하면, 유령과 하이파이브하고 잘 지나칠 수 있을 까?'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이 구체적인 질문들에 열심히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막연한 걱정을 지속하면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돕는 한 가지 방법은, 두려워하는 상황을 가급적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이에 대한 대처전략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내일 발표를 망하면 어떡하지?'에 머물러 있는 걱정을 구체화하여, 나에게 발표를 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발표 상황에서 내 몸에서는 어떤 감각이 느껴질 것 같은지, 그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 것 같은지, 청중들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것 같은지, 그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지, 발표를 망하고 나는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될 것 같은지 등등에 대해, 내가 지금 마치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심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생각의 끝에, '그래. 이런 상황을 대비하려면, 발표 연습을 충실히 해야 해'라는 현실적인 대안에 다다를 수도 있고, '에잇, 쉣! 머리 아프다. 그만 생각하자. 될 대로 돼라 그래.'라는 배포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막상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니, 발표 한번 망한다고 해서 인생이 망할 만큼 두려운 건 아닐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두려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뿌연 안개는 점점 걷히고, 두려움은 내가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손에 잡히는 작은 무언가로 변모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사로잡힐 때에는, 먼저 나의 생각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생각들일뿐이라고. 그리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지금 나는 무엇을 피하고 싶은 거지?'
위와 같은 내용을 나는 이론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기 마련이고, 나 역시 늘 뿌연 안갯속을 헤매는 것 마냥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다분하지만, 내 머릿속은 해야 할 일들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일은 이거 해야 하고, 그다음 날까지는 저거 해야 하고, 이거는 이렇게 하면 되고, 요거는 요렇게 하고.......' 이 생각의 끝에는 늘 '다 못하면 어떡하지?'가 따라다녔다. 그러니 쉬고 있어도 머리는 늘 복잡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할 일들 생각하느라 점점 정신이 맑아져서 불면증에 시달렸다. 지금만으로도 벅찬데, 갑작스레 할 일이 추가되거나 예상 밖의 이벤트가 벌어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 타고난 기질 덕에 일찍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인생, 그것 참 고단하도다. 그러다 할 일이 사라지면, 엄청난 공허감이 찾아왔다. 인생에 주어진 잠깐의 빈 틈을, 해야 할 일이 아닌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겠는 걸.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안갯속을 헤매고 있으니 과거는 불투명하고 불쾌한 것으로 기억되곤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모이면 과거사를 채굴하며 웃음이 끊이질 않는데, 나의 과거는 나보다 친구들이 더 자세히 기억하는 것만 같다. "너 그때 그랬잖아~"하면, 나는 "내가? 근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는 거야? 너무 신기하다." 어떤 사람들은 철 모르던 어린 시절, 걱정 없이 살던 때를 그리워한다는데, 누군가 나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보내줄 테니 원하는 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단칼에 거절할 것이라 확신했다. "됐거든요. 그 마음고생을 또 하라고? 차라리 빨리 늙는 길을 택하겠어."
과거에도 분명 즐겁고 반짝이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타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는 그렇게 세상 다 산 것 마냥 암울하거나 힘든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는 게 늘 그렇게 고단한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있으니,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느꼈으면 좋았을 경험들을 스쳐 보내고 말았다. 좋았던 것들을 마음속 성긴 뜰채 사이로 다 흘려보내고, 힘들고 고달픈 기억만 촘촘하게 쌓고 또 쌓고, 곱씹고 또 곱씹고... 누군가 내 인생 좀 구제해줬으면 했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 알코올 중독자 구씨와 야생의 본능을 숨기고 살아가는 염미정의 추앙 스토리가 나온다. 염미정이 자신이 만났던 개새끼 같은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구씨가 나도 그중에 포함되냐고 묻는다. 그러자 염미정이 '당신은 나한테 성역이야. 처음부터 추앙만 하기로, 그렇게 마음먹고 만난 거니까'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언젠가 나도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남을... 무슨 근거로 믿어요?" 그때, 나의 냉소적인 질문에 답해준 선생님은 그랬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믿기로 선택하는 거지."
그렇다. 어떤 믿음에는 근거가 필요없는 것이다. 융은 '믿든 믿지 않든 신은 그 곳에 있다.'고 하였고, 리네한도 '믿든 믿지 않든, 믿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필즈상을 탄 수학자 허준이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은 무너지기 쉬울 뿐이라고. 내가 나를 믿고 사랑하는 데 있어 어떤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해주길 바라면서, 왜 자기 자신은 그러한 믿음과 사랑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베풀길 주저할까. 염미정은 구씨를 절대적으로 추앙하기로 선택함으로써, 사랑을 갈구하는 수동적 위치에서 사랑을 베푸는 능동적 위치로 옮겨 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미쳤나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라며 자체발광하는 염미정이 드라마의 엔딩이었다. 그녀의 해방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믿기로 선택하는 거지' 그 답을 구한 무렵을 기점으로 나는 내 인생의 선택권을 스스로 조금씩 회복했다. 그래서 누군가 내 인생 좀 대신 구제해주길 바라며 안개 같은 두려움과 비현실적인 공상 속에 사는 대신,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기로. 미지의 문 뒤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전전긍긍하며 사는 대신, 내가 직접 내 발길이 닿는 곳의 문을 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 선택의 결과로, 나는 땡땡이와 쌩쌩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몸이 열개라도 모자를 순간들을 보내며 힘들 때도 많지만, 크게 봐서 나는 이런 생활에 꽤 잘 맞는 사람인 것 같다. 일단 아이들을 키우며 나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질문들을 더 이상 잘 던지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쓸모 있는 인간인가' 같은 것들. 그 질문들이 의미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경우에는 추상화된 이념의 세계에 머무르며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처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신에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되었다. '기저귀는 어느 브랜드가 좋은가',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꼭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도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그저 오늘 하루 아이들이 무탈하고,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잠 잘 자면 보람찬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서 벌어지는 작지만 신비하고 기쁜 경험들을 포착하는 순간들이 늘었다. 신생아 시절 땡땡이는 황달로 인해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 그 작은 몸에 채혈을 하느라,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땀을 뻘뻘 흘리는 와중에, '응! 애! 응! 애!' 하는 땡땡이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무슨 효과음을 넣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선명한 응애 소리에 남편과 나는 '오! 아가는 정말 응애응애 우는구나'하며 놀랐다. 그렇게 위기의 순간에도 새롭고 귀여운 추억을 남겼다. 표현력이 좋은 쌩쌩이는 생생한 감탄사로 무채색 경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요리에 재주라곤 없는 엄마가 만든 어설픈 스파게티에도 '우와, 맛있는 스파게티다. 신난다! 엄마 최고!'라고 해준다. 심지어 배달시킨 음식을 덜어 놓았을 뿐인데, '어쩜 이렇게 예쁘게 담아요?'라고 해준다. 저런 대사는 책이나 드라마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실재하는 거였어...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니, 체력이 금세 바닥나서 불면증도 많이 줄었다. 역시 머리를 비우고 몸을 움직여야 꿀잠을 자는 거였다. 할 일이 멈춘 빈틈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공허감에 빠져드는 일도 줄었다. 제발, 그들이 십 분만 더 자주길 바라며, 할 일 없이 널부러져 있는 이 자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은 것이다. 이 밤, 잠깐의 고요가 지나면,해가 뜨기 무섭게 두 녀석은 또 내 품으로 뛰어들겠지. 이불 안으로 다짜고짜 풀썩 뛰어들 때 그 충격은 미화되지도 않고, '아이고, 이것들아. 엄마 허리 부서진다!' 현실감 넘치는 진동과 고통을 남길 것이다. 마음이 힘들고 밤잠을 설칠 때, 가만히 아이들 곁에 누워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어 본다. 몰랑몰랑하고 부드러운 볼을 부비며, 너희들이 있는 이곳이 현실이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막막함이 밀려올 때, 끝없이 막막한 안갯속을 헤매일 때에도, 언제든 나를 다시 현실로 데려올 온기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 행복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사춘기 청소년을 지나, 더 이상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지 않는 때가 오겠지.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도통 이해를 못 했는데, 아이들이 내 품을 벗어날수록,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각인된 지금 이때를 추억하게 될 것만 같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선택한 거니까. 지금 보다 훨씬 속을 썩이더라도, 너희가 엄마에게 현실을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 현실에서 벌어지는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리라' 그렇게 다짐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