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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Oct 25. 2022

어떤 사랑은 응답받지 못할지라도

 우연히 알게된 그녀는 아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짝사랑 같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아빠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애타는 마음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다고 했다. 정작 자신의 사랑을 받는 아빠조차도, 그 마음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완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외로움이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그녀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에 콱 박혀서, 한동안 그녀를 마음에 품고 살았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떠올려 보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싶어 마음속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아빠를 짝사랑하는 그녀처럼, 나도 그녀를 향한 짝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마도 그녀에게서 나와 닮은 어떤 모습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그 아이를 보살펴야 할 것 같은 마음 말이다. 하지만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저버렸고, 끝없는 죄책감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곤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본인이 겪은 애착 트라우마를 한평생 짊어지고 살았던 것 같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데, 자신이 내려받지 못한 사랑을, 자녀에게 온전히 내려주지 못함으로써, 이 사랑은 흐르지 못하고 어느 지점에 막혀 있는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막힌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구멍과도 같아서, 밑 빠진 독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일지도.


 그녀와 나의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그런 아빠를 사랑하기가 참 힘들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사랑과 돌봄을 베풀 것이라 기대되는 존재가 나의 돌봄과 이해를 요구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빠는 부모를 일찍 여읜 자신의 처지를 연민하였고, 자식들마저도 자신을 가엽게 여겨 모든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양과 색깔과 크기를 가진, 그런 이해를 바란 것일까? 그러기에는 부모의 위치와 자식의 위치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사랑일까(2012, 원제: Take this waltz)>라는 영화를 보면, “인생에는 늘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미친놈처럼 그걸 일일이 다 메꿔가며 살 순 없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이 대사를 말하는 등장인물조차도 그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마찬가지로 아빠도 그 빈틈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셨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 한 올도 용납하지 못하는 아빠의 결벽은 마음의 영역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처를 가진 자가 상처받은 사람을 더 잘 이해할 것이란 기대는 때로 섣부른 추측이다. 자신의 상처가 너무 기구한 나머지, 이 기구함을 절대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다른 이의 상처를 돌볼 여유가 없을 때가 있다. ‘내가 상처받은 만큼, 당신도 상처받았겠지’가 아니라, ‘당신이 나만큼 상처받았어?’가 되어 버린다. 또는 나와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고립무원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사는 게 외롭다고, 세상은 혼자라고 말하는 아빠를 보며, ‘왜 나로는 충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 나는 힘든 인생에 한줄기 의미가 되지 못할까? 어떻게든 의미가 되어주고자 나를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무의미함을 뒤로하고,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기가 참 어려웠다. 주어진 인생이니 어떻게든 살아내겠지만, 달가운 인생은 아니라고.


 그리고 아빠와 닮은 점이 많은 나는 마음속 구멍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마음의 작은 불일치도 견디지 못하고, 실망하고, 멀어 지기를 반복했다.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정상에 올려놓아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끝도 없이 반복될 것 같은 지긋지긋함. 그렇게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이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는 것 만이, 완전한 이해와 일치에 도달하는 것 만이 유일한 의미이자 탈출구 같았다.

 

 “그냥 굴러 떨어지게 둬. 그 바위가 꼭 정상에 있어야만 네 삶이 의미 있어질 거라는 기대를 버려. 마음속 구멍을 꼭 아귀가 맞는 장돌로 틀어막아야만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느 순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마음에 울렸다. 매달려도 안 되는 일에 마음 쓰지 말라고. 바위는 굴러 떨어지게 두고, 내가 가꿀 수 있는 밭을 일구러 가라고. 하지만 이 마음을 먹기까지는 반드시 누군가의 조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 수 있음을 믿게 해 주는, 섬세하게 조율하면서도 조율의 실패를 견디어 주는 존재.

  한참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다. 상담을 마치고 상담소를 나가려고 하는데, 현관에 신발이 가득 쌓여서 내 신발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선생님을 부르자, ‘으이구’ 하면서도 쭈그려 앉아 같이 신발을 찾아 주었다. 꿈속에서 마침내 신발을 찾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신발끈을 고쳐 메고 내가 일굴 의미가 있는 땅을 찾아 길을 떠났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거대한 바위에서 빗겨 나고 보니, 무의미함에 절어 있던 그 시절에도 충분히 의미 있는 손길들이 나를 떠받쳐주고 있었다. 내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완전히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 매달리느라 보지 못했을 뿐. 그들은 기꺼이 나에게 다가와주고, 말 걸어주고, 불러내 주었다. 한때 나는 성격이 이래서, 내성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은 나와 달라서, 그들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거라고 되지도 않는 합리화를 했다. 진심이 아닐 거라고, 그들이 기꺼이 나누어 준 관심과 노력의 가치를 폄훼한 것이다. '세상은 혼자고,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해'라는 목소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리라 기대되는 존재가 하는 말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유 없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노력, 그것이 곧 사랑이 아니던가. 완전히 내 마음에 꼭 들어맞는 쫀쫀한 그물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느슨하고 성긴 그물들이 겹겹이 쌓여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던 게 아닌가. 깨진 물독을 가득 채우지 않더라도, 목을 축일 생명의 물은 작은 종지로도 나눌 수 있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녀를 생각한다. 어쩐지 나는 기도하는 마음이 되어, 그녀가 이 고비를 잘 넘어가기를, 언젠가 그녀 만의 작은 밭을 일구게 되길 응원해 주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떠올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많은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만약 알게 된다면,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자신에게 애틋함을 품고 있다는 게 기묘하고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마음이 꼭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그녀를 떠올리며 내 안의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은, 현실 속의 그녀이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속에 그녀와 닮은 어떤 부분에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는 것은 잊고 있던 나의 부분에 애정과 관심을 쏟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상대가 내 마음을 꼭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내 마음 안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응답받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아빠를 충분히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것이 아빠를 애도하는 방식인 동시에 그녀 자신을 돌보는 방식이라면 말이다.


 어떤 사랑은 꼭 양방향으로 흐르지 않더라도, 예상 밖의 물줄기들이 여기저기로 뻗어 나가 메마른 땅을 살리기도 한다. 이 순간 그녀는 아빠를 생각하고, 나는 그녀를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나를 애틋하게 생각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마음의 모양과 크기가 꼭 똑같지는 않더라도, 간절히 애정을 갈구하던 그 대상으로부터 꼭 보답을 받아야만 마음속 구멍을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눠 받은 조각들로 얼기설기 메꿔가며 사는 게 아닐까. 언젠가 내가 다른 이에게 받은 위로와 응원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크게 보면 그렇게 기우뚱하게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얼마 후,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동안 당신을 마음에 품고 지냈다고, 이유 없는 애정을 마구 쏟아주고 싶었다고 수줍게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한결 또랑또랑하고 생기 있는 목소리로 그 마음을 느꼈노라고 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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