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야 하는 것이었다'
곤두박질쳐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한 마리의 애벌레가 된 기분으로 새롭게 도약할 다음 방법을 줄곧 생각해왔다. '다시 그렇게 기어오를 것인가, 아니면 인고의 시간을 거쳐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것인가'를 말이다.
어린이 서고에서 집어 들어온 <꽃들에게 희망을>은 완벽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 그것도 치열하게 인생을 살다 두 무릎이 다 벗겨질 만큼 세게 넘어지거나, 그 고통으로 목 놓아 엉엉 울어본 사람들에게 더욱 크게 와 닿는 그런 이야기였다.
북적거리는 카페 안에서 동화책을 부여잡고 눈물 흘리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할까 봐 순간순간 울컥거리는 감정을 조절해야 했다. 책을 읽는 동안은 현실의 각종 타이틀을 이름표로 붙이고 있는 내가 아니었다. 그 순간은 완벽히 책 속에 등장하는 한 마리 호랑 애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그 끝을 알 수 없으면서 막연히 상승하려고만 했던 호랑 애벌레의 모습 속에서 과거의 나를 만났다.
대체 그 꼭대기에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를 떠나 또다시 애벌레 기둥에 합류하게 된 걸까. 조금 더 나은 전셋집 보증금, 아직 근처도 가지 않은 노후를 대비하면서 현재의 즐거움을 미래로 미뤄두던 과거의 나 역시 그 애벌레 기둥 어딘가에서 다른 애벌레들의 머리를 짓밟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꼭대기에서 밀고 밀려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까지는 그 기둥에서 내려올 생각도, 날개를 갖고 자유로워지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 별거 있냐며 각박한 사회로부터의 맷집이 두둑해져 더 이상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어느 누군가의 삶처럼, 남의 불행은 그저 나의 일이 아님이 다행스럽다는 누군가의 삶처럼 말이다.
하지만 호랑 애벌레는 결국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겉보기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해야 가능한 고치가 되는 두려움을 이겨냈다.
애벌레 기둥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애벌레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읽고, 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의 언어를 이해했다.
호랑 애벌레의 인생 관점은 이전과 확연히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소통을 중심에 놓았으며, 자유를 찾아줄 날개를 향해 고치가 되는 과감한 용기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비가 되었고, 그 나비는 들판의 수많은 꽃들에게 희망을 심어 날랐다.
애벌레가 나비로 성장하는 과정의 이야기에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제목이 처음엔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다.
이야기에서 '꽃'은 글을 통해 감동의 꽃가루를 나비에게서 전달받은 우리 개개인의 모습일 수도 있고, 나비가 피워내려고 하는 꽃, 즉 고통을 딛고 희망으로 일궈내고 싶은 우리들의 '꿈'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희망의 꽃을 만나기 위해서는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되어야 한다.
고치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두려움에 떨어 본 눈물겨운 경험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온 삶의 순간을 돌이켜보면, 그 어느 한순간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왜 나의 삶은 늘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기도 지칠 정도로 그 문장은 내 삶 속의 한 부분에 각인되어 있었다. ‘무엇을 해도 잘 안 되는 인생’이라 못 박아둔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가난했던 집안 환경과 부모님, 책임감 없이 도망치고 만 사랑을 구실 삼아 늘 핑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비의 몸체가 다르면 날개의 크기도 다르다는 것을..
더욱 크고 웅장한 날개는 쉬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