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영이의 책 파먹기
또 다른 제목을 붙여 감상평을 쓰던 나..
한강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고 나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생각하며 적절한 제목을 붙이려 해도..
이 제목 '바람이 분다, 가라' 이상의 무언가가 생각나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대체로 '아, 이 사람이 왜 이런 제목을 붙였구나' 하는 생각이 슬슬 시작되다가 책을 덮는 시점 그 확신이 명료해지곤 하는데, 이 소설은 내용 전개 중 제목과 연계된 단서가 흐릿한 선 하나로 드러났다 사라졌다.
주인공 인주가 체육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이유의 시작..
바람에 의해 인주의 다리 위로 높이 걸린 바가 떨어졌고 그녀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그러나 바람 때문이 아니라고.. 어쨌든 미치도록 그 바를 넘고 싶었던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인주..
바람이 불어도 가려던 인주, 증오하던 죽은 엄마의 진실을 찾아 미시령 고개를 찾고 죽음을 맞이한 그녀..
누군가의 잘 짜인 계획대로 자살로 마무리된 친구의 죽음을 놓지 않고 파헤치려는 친구 정희..
인생의 바람이 부는 날,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작가 한강이 2010년 펴낸 이 소설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이다.
<채식주의자>에 이어 접하게 된 이 소설 역시 난해하고 어둡다.
사람들은 이런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암흑 속을 헤매는 불편함을 경험하곤 한단다.
그러나 누구나 그래 본 적이 있듯 햇빛이 비치는 일상에서 푹 꺼져 내려온 어느 날 그 위치에서 바라본다면 딱히 난해하거나 불편할 것도 없는 사람 이야기..
내게는 그들의 이야기가 책장 넘기기를 포기할 정도로 충격적이진 않은 것 같다.
인주는 미시령에서 구조되고 사흘 만에 생을 달리한다.
'인주가 그 겨울 눈 쌓인 미시령엔 혼자 왜 갔을까?'
친구 정희의 의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화가 인주의 기념관을 만들고 평전을 쓰겠다고 나타난 강석원이란 존재..
죽기 전 인주가 그린, 삼촌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들..
인주의 작업실 쪽지에서 찾아낸 심리상담소 류 소장의 인주 어머니에 관한 기억의 고백들..
담담하고 느릿하게 진행되던 전개가 정희가 강석원 몰래 인주의 작업실에 잠입하면서부터 급물살을 타고 콸콸 흐르기 시작했다. 추리소설 특유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대체 왜,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생각하며 보게 된 감성적인 추리소설의 느낌?
곧 다가올 한겨울의 미시령을 눈 앞에서 보는 느낌도 책을 보는 내내 계속되었다.
뭉텅뭉텅 쏟아지는 폭설의 무게가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한강 작가의 표현은 정말 부럽고 배우고 싶은 보석이었다.
인주가 죽기 전 잠시간의 시간을 들여 그려낸 기묘한 그림 <달의 뒷면>
강석원이 펴낸 인주의 평전 제목도 <달의 뒷면>
달의 뒷면은 지구를 중심으로 함께 공전, 자전하는 달의 규칙성으로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이다.
볼 수 없는 곳, 그래서 진실을 묻어두거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근원이 발원하는 곳..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우리가 보는 달의 표면은 50%가 아니라 이따금씩 그 규칙성이 조금씩 흔들거릴 때 달의 뒷면도 살짝 그 얼굴을 드러낸다고 한다. 비밀을 발설하는 누군가의 방정맞은 입처럼.. 눈이 덮이면 잠시 모든 진실이 가려지지만 이내 봄이 찾아오면 고스란히 그것들을 토해놓을 미시령 고개처럼..
인주와 정희는 아주 특별하게 이상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진실이 묻힌 달의 뒷면을 계속해서 보려고 발버둥 친 사람들이었다. 보통사람들이 궁금해하지도 않는 그 달의 뒷면..
소설은 전체적으로 지구와 우주공간, 별의 탄생, 우주의 시작 등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며 전개된다.
정희와 풋사랑을 나누다 요절한 삼촌의 그림들 속에는 늘 우주의 어둠과 시작을 뜻하는 듯한 원형의 먹 자욱이 가득했다.
붓의 터치가 아닌, 떨어진 먹의 중심에서 물을 머금고 화선지로 번져나가는 줄기들..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무언가의 시작 그 이전으로 가면 모든 것이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나를 이루고 있는 그 무언가가 당신의 그 안에도 똑같이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렇게 생각하면 삶은 참 단순한 질서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의 시작으로 귀결되는 그 질서들을 믿으며 정희를 그리워했을까?
삼촌이 살아있던 그 시간들 속에는 정희의 흔적도 함께 있으니 기억을 더듬어 그녀를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유달리 힘없이 가늘고 연하게 뻗어나간 먹줄기,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인주를 죽인 건 강석원인 것 같아.. 달의 앞면처럼 눈으로 보이는 흐름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이 소설은 달의 뒷면 같은 무수한 질문을 남긴 채 이야기를 끝맺는다.
작가 한강의 또 다른 어두운 이야기들이 기대되는 징검다리 같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