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vs 흰 한강 소설 <흰>

철없는 영이의 책 파먹기

by 철없는 영

어린 시절,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 물으면 늘 "하얀색"이라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하얀.. 또는 흰..

또래의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원색 계열을 선호하던 것에 비해 조금은 특이하고도 심심했던 색..


집에서 라떼를 만들던 어느 날, 문득 어린 시절 하얀색을 좋아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도 강해 보이는 짙은 갈색 커피 위로 따뜻하게 데운 흰 우유가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가면 그 강하던 짙은 갈색이 부드러운 연갈색으로 순식간에 변신을 완료한다.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던 사람이 무언가에 의해 갑자기 깊은 주름을 펴고 온화한 미소를 짓는 느낌이랄까..

아마도 어린 날, 나는 그런 느낌들 때문에 하얀색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척박했던 가난, 밝게 웃으려 노력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게 느껴졌던 부모님의 지친 미소.. 그런 것들에 따뜻하게 잘 데운 하얀 무언가가 슬며시 녹아들면 라떼처럼 조금은 부드러워져 내 맘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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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부커상 후보작이었던 작가 한강의 소설 <흰>

작가가 태어나기도 전, 20대 초반이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단 몇 시간을 살다 간 팔삭둥이 언니를 재건한 이야기.. '그녀가 살아있었다면'을 가정해 작가의 몸 위에 재건된 언니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특이한 소재.. 나치 정권 때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 위에 다시 태어난 동유럽 어느 나라에서 작가는 죽은 언니가 되어 잠시간의 시간을 보낸다.


작가가 떠올린 흰 것, 강보, 배내옷, 달떡, 수의..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모든 흰 것..

작가에게 '흰' 이미지는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가 말하는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고 한다. 1945년 미국의 공군기가 촬영한 폐허가 된 동유럽의 그 도시도 흰 빛의 슬픔을 반짝였다. 폐허가 된 잔해 더미는 마치 눈밭의 형상을 하고 폭격의 아픔을 지우려 처참히 애쓰고 있었다.


흰.. 어떤 정신이나 영혼과도 맞닿아 있는 고결한 느낌..

그래서 작가는 언니에게 모든 흰 것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힘없이 까만 눈을 열고 있던 언니의 몇 시간, 피 묻은 그 연약한 육체를 감쌌던 흰 배내옷과 강보.. 자신이 넘나드는 그 생사의 경계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여린 육체를 위로했던 흰 패브릭.. 이 세상 어떤 더러운 것과도 상관이 없는 순결한 그 물건들의 하얀 위로..


그런데, 흰 느낌으로 사는 거..

누군가가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면.. 그건 강하게 뜯어말리고 싶다.

어차피 세상에 발을 딛는 순간, 온갖 색들이 그 흰 영역을 침범할 테지만.. 그래서 전혀 불가능한 일인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보면 흰 것은.. 지친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건네고픈 어떤 선물 같은 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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