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이 되고, 나의 목소리가 되어
한강<희랍어시간>

철없는 영이의 책 파먹기

by 철없는 영

연이어 읽는 작가 한강의 네 번째 소설, <희랍어 시간>


무겁고 어두운 그의 소설 느낌이 부담스러워 책장을 덮었다는 후기들을 줄곧 봐왔는데

왠지 모르게 난 한 권을 끝내면 이내 곧 다른 한 권의 내용이 몹시 궁금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겠다고 세월을 보낸 지 3년.. 처음으로 조도와 온도가 비슷한 작가를 만난 것 같다는 기쁨에 그의 소설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흰>과는 다르게 이 책 <희랍어 시간>은 상황과 감정들을 묘사하는 문장이 매우 철학적이다. 후루룩 읽히기보다 수수께끼를 풀듯 그 문장 안에 숨겨 놓은 뜻이나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 다시 읽어야 하는 문장들이 제법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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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시대의 언어..

현대의 언어처럼 극 세분화되기 이전의 중의적이고 덩어리 진 신비한 언어..

낯선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 언어의 줄을 다시 잡고 싶어 하는 여자와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 이야기..

희랍어라는 소재가 주는 신비함도 그렇고, 언어를 천재적으로 이해하고 습득한 여자의 느낌도 그렇고.. 독일에서 희랍어를 전공하고 굳이 한국에선 돈도 되지 않는 그 무기를 들고 혼자 살아가려 하는 남자의 엉뚱함 모두 이 소설의 낯설고 신비한 느낌을 구성하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등장인물 인주의 그림 제목 '달의 뒷면'같은 느낌으로 이 소설을 보자면, 겉으로 보이는 명백한 달의 앞면은 힘겨웠던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다. 이혼 후 양육권도 빼앗기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여자, 어릴 때부터 그녀 안에서 늘 소용돌이치던 단어와 문장에 지쳐 심리적으로 입을 닫고 말을 잃게 된.. 독일에서 희랍어를 전공하고 말을 하지 못하던 독일 여자와 사랑에 실패한 뒤 한국으로 건너온 남자, 점점 잃어가는 시력으로 버티는 그.. 미묘하게 비슷한 시간, 비슷한 공간에서 맴돌던 그들은 결국 만나게 되었다. <채식주의자>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 소설 주인공들은 결국 만나게 될 인연이랄까?


소설을 읽는 내내 여자 주인공과 작가 한강의 이미지가 겹쳐서 다가왔다. 어릴 적 문자를 통으로 외워 스스로 한글을 깨치고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이 늘 그 안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켜 힘들었던 천재..

어렸지만 새벽녘 밝아오는 어스름한 박명 속에서 그 황홀한 분위기를 좋아했던 아이..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천재가 아니었더라도 젊은 나이에 작가로 등단, 나이에 비해 다작을 한 작가의 삶 속에는 모든 곳에 먼지처럼 단어와 문장들이 쌓여있었을 것 같다. 이리저리 조합하고 만들고 구성하고 표현하고.. 신물이나 구토가 올라올 지경으로 그것들을 접해야 했을 그가 안쓰러워졌다.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희랍어 시간>에 여자 주인공을 이야기할 때면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말이 나오는 혀나 목구멍..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들끓는 말.. 음성을 통해 흘러나올 수 없지만 세 치 혀의 경박한 무엇이 아닌, 달콤한 목소리로 진실을 가리지 않은, 진실 본연의 것.. 작가는 그런 언어를 늘 찾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앞서 읽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도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응축시킨 단 하나의 단어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것이 가진 에너지가 폭발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는..

실상 세계는 약속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상황과 감정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깨울 수 있는 언어 너머의 무엇.. 어쩌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만 굴러다닐 그것.. 작가는 그런 느낌들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딱히 특별한 이유가 없는 두통과 위경련이 찾아왔다.

요즘 작가 한강의 소설 속 캐릭터로 너무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텨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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