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는 매일 어른이 되길 꿈꾼다.
20대는 언젠가 이루어질 꿈들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한다.
30대는 꿈을 이룰 수 없을까 봐 불안 속에서 꿈을 꾼다.
40대는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40대 아줌마는 꿈을 꾸면 사치고, 배부른 소리고, 철없는 이야기다.
20대를 막 지나갈 무렵, 나의 꿈은 해외로 아트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때는 돈도 없었고 영어도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 나이였다.
요즘은 30살이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난 '30살은 노처녀'라는 말을 듣고 자란 세대였다.
이제 막 서른이 된 내가 영어 공부에 포트폴리오 준비에, 학비와 생활비도 미리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준비 기간만 최소 2~3년 운이 좋아서 원서 넣고 바로 합격한다고 해도 비자를 받으려면 또 6개월에서 1년, 어찌어찌 졸업하면 30대 중반이었다. 준비도 문제지만 나이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유학원을 알아보면서도 이 나이에 이걸 준비하는 것이 미친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민스러웠다. 그러던 중 남편을 만났고 엉뚱하게도 난 그때까지 한 번도 꿈꾼 적 없었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육아와 살림으로 10여 년이 흘러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난 40대가 홀랑 넘은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40대 아줌마는 뭘 하기에도 참 애매한 나이다.
초등학생 아이들을 둔 나는 전 처럼 유아를 케어하느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육아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을 학교로 학원으로 실어 나르고 아이들의 학원 스케줄과 공부 스케줄을 조정하고 간식과 식사를 정성스럽게 챙겨줘야 한다. 버릇없이 굴 때는 인성교육도 시켜야 하고 심지어 밤에 잘 때 옆에 누워있기도 한다.
나는 현재 이러기도 저러기도, 애매한 포지션인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지만, 뭔가 시간이 애매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들을 놔두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애매하게 할 수가 없다.
너무 젊은 것도, 그렇다고 너무 늙은 것도 아닌, 40대는 새로운 꿈을 꾸기에도 애매하다.
빨리 뭔가를 해야 하는데 흐르는 시간이 아깝다. 하지만 아직 가정을 박차고 나갈 수는 없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강좌가 있길래 '이거다' 싶어서 냅다 신청했다.
'그래, 한번 열심히 해보자!'
나처럼 작가를 꿈꾸며 글을 쓰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고 또 현직 작가의 강의가 기대가 되었다.
드디어 강좌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에 참석하였다.
강사님은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분이셨다.
강사님 포함 20명이 좀 안되는 인원이 도서관 세미나 실에 옹기종기 모였다.
오전에 하는 강좌라서 엄마들이 오려나하고 예상은 했지만, 그 분위기는 예상과 좀 달랐다.
내 나이 또래도 있었지만, 의외로 50대 60대 분들이 많이 계셨고, 70대도 두 분이나 계셨다.
수업은 강사님의 소개로 시작하여 책 속의 일러스트를 함께 감상하고 책 내용을 다 같이 읽거나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한두 줄씩 읽기도 하였다.
'흠... 글쓰는 법은 언제 알려주려나?'이런 생각을 할 즘에 갑자기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자기소개는 한 사람씩 앞에 나가서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간단한 본인 소개와 이 강좌를 신청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여기서 나는 흥미로운 점을 한 가지 캐치하였는데, 그것은 40대 후반부터 60대의 회원들이 하는 이야기가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이랬다.
발표를 마칠 때마다 마치 서로 격려하듯 힘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곧 다가올 나의 미래를 미리 체험한 것 같아서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어쩌면 곧 닥칠 나의 미래는 저분들이겠구나'
'이 나이에도 행복해요!'라고 하셨으면 좋았을걸.
'엄청 멋지고 폼 나는 50대를 보내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갱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힘든 중년의 시기를 보내고 계셨다.
'혹시 여기는 글쓰기 모임이 아니라, 집단 상담 모임인가?'라는 웃픈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앞으로 5~6년 후...
'(구슬픈 목소리로) 갱년기로 가득이나 힘든데... 그동안 저를 위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고 크흑... 제 인생이 없어서 너무 허탈하고 괴로워요. 애 시키들은 지들이 잘나서 혼자 큰 줄 알고, 남편 놈의 시키는 그냥 원래 재수가 없어요. 크흐흐흑'이라며 대성통곡하고 싶지 않다.
'갱년기'가 뭔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난 녀석이라 지금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는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내 일상을 더 최악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없다. 빨리 뭔가 해야 한다.
공부를 해볼까? 회사에 취업해야 하나? 너튜브라도 시작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 어떤 것도 올인하기에 아주 애매한 상황이다.
오늘도 나의 50대의 시작을 갱년기의 우울증과 맞이하지 않으려고, 무거운 몸을 잡아끌어 할리땡 테이블에 앉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쓰며, 내가 쓴 글에 내가 눈물 흘리고 내가 웃겨 죽겠고, 미친 사람처럼 혼자만의 희로애락에 빠진 이 와중에도 아이들의 전화를 수십 통이나 받았다.
(아, 오늘 하필이면 급 소나기가 와서... 왜 지갑은 안 들고 학교에 갔니... 엄마는 너무 멀리 있단다... 미안하다. 엄마도 숨 좀 쉬자.)
어제 너튜브에서 40대 유학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았다. 괜히.
어느 영상 하나가 눈길을 끌었는데, '제목은 39세에도 석사 유학해도 되나요?'였다.
영국의 예술 대학원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40살 미혼 남자의 채널이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일 때문에 30대 초반에 생전 처음으로 외국이라고 나간 곳이 영국이었고, 우연히 그 곳 예술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20대 유학생들을 만나게 되면서, 유학은 어느 부잣집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다가, 매력적인 영국의 분위기 그 속에서 예술을 하는 빛나는 어린 청춘들, 그리고 남의 나라말도 어찌그리 잘하는지, 노랑머리 애들과 뭔 얘기를 그렇게 쏼라쏼라 재밌게 하는지,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돈도 없고 나이도 많은 자신과 너무 비교되고 서러워서,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부럽고 아름다워 보여서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미친 듯이 돈 벌고 영어 공부해서 결국 거의 10년 만에 당당히 꿈을 이루셨다고 한다.
이 영상에서 그는,
라고 말했다.
이 영상을 보면서 20대 후반에 내가 느꼈던 감정과 너무 비슷해서 그리고 결국 꿈을 이룬 이 사람이 한 말들이 어떤 것인지 너무 알 것 같아서 내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꿈을 꾸는데 꼭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까. 꿈을 꿀 자격이 있어야 할까.
그 꿈이 아무리 하찮아도, 아무리 터무니없거나 주제넘은 꿈이라고 해도 꿈을 꾸고 그것을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을 멈추면 안 된다.
내 머릿속, 그리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사는 꼰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오늘부터 뜬금없는 IELTS(아이엘츠) 공부나 해봐야겠다. 혹시 모르지 않나 애매한 40대를 지나 확신의 50대가 오면 꿈을 이룰 수도 있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