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aun SHK Apr 19. 2022

찌질한 흑역사면 어떠하리

고향에 내려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각자 다른 지역에서 일하다 보니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명절 때나 시간 맞을 때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날처럼  명 모두 함께 만난 건 꽤 오래간만이었습니다.


근황 이야기, 일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던 중 자연스레 옛날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날 소재는 20대 초반 각자의 흑역사에 관한 이야기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싫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본인 경험을 웃음 소재로 삼으려고 경쟁하듯 야기 꺼냅니다.


한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대학생 때  좋아하던 후배에게 고백하고 거절통보 받았는데,
내가 술 먹고 다시 전화해서 혹시 정말 안되겠냐고 매달렸던 거 기억나냐.


그때 함께 고민 상담을 해줬던 다른 친구가 박장대소를 하며 참 많이 질척댔다 맞장구 쳐줍니다.

"그때 참 찌질했."


한바탕 낄낄대다가 다른 친구가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나는 3:3 미팅에 나갔는데, 상대방 쪽에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한 명이 나가더라.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친구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챙겨주러 가야겠다고 또 나가고… 혼자 남은 사람은 자기 혼자만 남았으니깐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하면서 나가고... 이렇게 3명이 다 가버렸지.


"그냥 그렇게 다 가버렸다고?"


"응, 미팅 시작하고 30분도 안돼서 상대방이 전부 도망갔는데 우리 쪽 3명은 상대방한테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주선자한테 불평도 못했네."


무례한 행동에 바보같이 당했던 그 친구의 상황에 대해 다 같이 낄낄 웃어줍니다.


모두들 그때 그 시절 어리숙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고 조급했던지, 왜 그렇게 쉽게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철없고 센스 없고 미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쟁이라는 단어보다는 찌질함이라는 단어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거냐?”

"그럼"

“물론이지”

“나도”

그때로 돌아갈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모두가 흔쾌히 그렇다는 답을 했습니다.

군대를 한번 더 다녀와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더라도 네 명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모두 그때로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대답의 의미는 지금이 싫어서 좋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면 조급하고 미숙했던 내 모습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해하고 성숙함을 갖춘 모습으로 새롭게 20대를 보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20대 초반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각자꿈을 그리며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날 순간입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 입시에만 파묻혀 지내던 소년소녀들에게 그 시절은 미숙함이 가득한 때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기 때문인지 과거를 돌아볼 때 미숙한 내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고 멋있는 모습이 떠오르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 과거와는 다른 행동을 했다면 보다 멋있는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날 모인 4명은 모두 과거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때로 돌아갈 수 없고 우리는 그저 그때의 미숙함을 이야기 삼아 한바탕 웃을 이라는 점을 입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때와 다른 행동들을 할 거라고 다짐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라면 부끄러워했을 흑역사를 서로 앞다퉈 끄집어내 웃음 소재로 삼을 정도로 이제는 모두 많이 능청스러워지고 많이 뻔뻔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럼없이 자기 찌질함을 이야기할 수 있게 나이 들었고 서로를 웃기려고 흑역사를 꺼내놓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과거의 미숙한 모습들 덕분에 서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는 다음번에 다시 만나더라도 또 다른 서로의 찌질함을 추억하며 웃게 될 것입니다.


폼나고 멋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좀 모자라고 미숙한 흑역사도 좋습니다. 조금 덜 멋있고 조금 덜 성숙하면 어떻겠습니까. 덕분에 지금 함께 더 많이 웃고 있으니 말입니다.


찌질한 흑역사가 있더라도 그리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흑역사들이 서로를 유쾌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르니까요.





이전 05화 졸업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