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내려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각자 다른 지역에서 일하다 보니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명절 때나 시간이맞을 때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날처럼 네명 모두 함께 만난 건 꽤 오래간만이었습니다.
근황 이야기, 일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던 중 자연스레 옛날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날 소재는 20대 초반 각자의 흑역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싫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본인경험을 웃음 소재로 삼으려고 경쟁하듯 이야기 꺼냅니다.
한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대학생 때 좋아하던 후배에게 고백하고 거절통보 받았는데, 내가 술 먹고 다시 전화해서 혹시 정말 안되겠냐고 매달렸던 거 기억나냐.
그때 함께 고민 상담을 해줬던 다른 친구가 박장대소를 하며 참 많이 질척댔다고 맞장구 쳐줍니다.
"그때 넌 참 찌질했지."
한바탕 낄낄대다가 다른 친구가 이야기를이어나갑니다.
나는 3:3 미팅에 나갔는데, 상대방 쪽에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한 명이 나가더라.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친구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챙겨주러 가야겠다고 또 나가고… 혼자 남은 사람은 자기 혼자만 남았으니깐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하면서 나가고... 이렇게 3명이 다 가버렸지.
"그냥 그렇게 다 가버렸다고?"
"응, 미팅 시작하고 30분도 안돼서 상대방이 전부 도망갔는데 우리 쪽 3명은 상대방한테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주선자한테 불평도 못했네."
무례한 행동에 바보같이 당했던 그 친구의 상황에 대해 다 같이 낄낄 웃어줍니다.
모두들 그때 그 시절 어리숙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고 조급했던지,왜 그렇게 쉽게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철없고 센스 없고 미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멋쟁이라는 단어보다는 찌질함이라는 단어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거냐?”
"그럼"
“물론이지”
“나도”
그때로 돌아갈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모두가 흔쾌히 그렇다는 답을 했습니다.
군대를 한번 더 다녀와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더라도 네 명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모두 그때로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대답의 의미는 지금이 싫어서 좋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면 조급하고 미숙했던 내 모습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해하고 성숙함을 갖춘 모습으로 새롭게 20대를 보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20대 초반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각자의 꿈을 그리며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날 순간입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 입시에만 파묻혀 지내던 소년소녀들에게 그 시절은 미숙함이 가득한 때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기 때문인지 과거를 돌아볼 때 미숙한 내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고 멋있는 모습이 떠오르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 과거와는 다른 행동을 했다면 보다 멋있는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날 모인 4명은 모두 과거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때로 돌아갈 수 없고 우리는 그저 그때의 미숙함을 이야기 삼아 한바탕 웃을 뿐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때와 다른 행동들을 할 거라고 다짐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라면 부끄러워했을 흑역사를 서로 앞다퉈 끄집어내 웃음 소재로 삼을 정도로 이제는 모두 많이 능청스러워지고 많이 뻔뻔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럼없이 자기 찌질함을 이야기할 수 있게 나이 들었고 서로를 웃기려고 흑역사를 꺼내놓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과거의 미숙한 모습들 덕분에 서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는 다음번에 다시 만나더라도 또 다른 서로의 찌질함을 추억하며 웃게 될 것입니다.
폼나고 멋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좀 모자라고 미숙한 흑역사도 좋습니다. 조금 덜 멋있고 조금 덜 성숙하면 어떻겠습니까. 덕분에 지금 함께 더 많이 웃고 있으니 말입니다.
찌질한 흑역사가 있더라도 그리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흑역사들이 서로를 유쾌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