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마산 분이셨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어머니 사이에서 나와 형이 태어났다. 현리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기에 내가 쓰는 어투가 표준어라고 생각했다(출생신고는 현리로 되어 있지만 현리에서 살았던 기억은 전혀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어느 지역엘 가도 거부감이 거의 없다.
외할머니께서는 사투리가 워낙에 심하셨기에 당연 사투리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말투에 익숙했던 나는 당연 표준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심지어 아버지 또한 서울말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지만, 어머니께서는 이북사투리가 심한 집안이라고 하셨다.
사실 내 말투는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정체성에 혼란이 왔던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이의 말투(혹은 어투 | 語套)나 억양은 가정환경이나 사는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러한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을 것이고. 살다 보니 주변 지인들에 의하면 나의 말투나 억양, 화법 등이 일정하지 않다고들 한다. 우선은 지역사투리가 심했던 부모님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귀에 익숙했던 단어들과 표현들이 나에게는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졌고, 그 때문인지 나의 주변 모두가 다 그렇게 쓰는 줄 알았다.
대학교 입학 후 경기도권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어린 시절 외국에서 잠깐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기 때문에 나의 기본 말투와 표현은 서울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사용하는 단어나 체계는 가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 친구들조차도 가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분명 이놈이 서울말을 하고 있는데 "왜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사용하지", 하는 눈치일 때가 있었다.
아니꼽다 보다는 앵꼽다 라는 표현이 편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보다는할무이 할부지(혹은 할매 할배)가 편했던 서울의 아이였다. 그렇다고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너무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 마산에 놀러 갈 때면 그곳 아이들이 "서울서 왔다"고 뭐라고 놀려댄들, 뭐라고 하는지 다 알아듣고서 맞받아 쳤고 우리들에게 쉽게 텃세를 부릴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 치고는 형하고 내가 한 덩치 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얼마 전에는 아내와 커피숍에서 각자 커피 한잔과 샌드위치를 시켜 먹은 적이 있다. 직원분에게 내가 고른 빵을 가리키면서 당당하게 "이거 떼파주세요", 라고 했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데워주시겠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아차 싶었겠지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건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고향이 어디세요?
나와 처음 대화해 본 사람이 나에게 건네는 질문 하나.
이럴 때마다 본적을 얘기해야 할지, 태어난 곳을 말해야 할지, 가장 오래 살았던 지역을 말해야 할지 헷갈린다. 분명 학연지연을 알아보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을 테다. 비즈니스 관계로 만난 사이는 아니었기에. 한 곳에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서울사람이라고 둘러댄다. 내 말투만으로는 매번 믿지 않는 눈치지만. 한 번은 부산에서 강의를 하다가 학생 중 한 명이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며 서울은 아닌 것 같다고 했었던 게, 가끔 긴장할 때면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는 듯싶다. 학생들끼리 알아들을법한 내용도 내가 알아듣고서 대답하면 놀라기도 하고. 그래서 물어봤으려나. 또 한 번은 부산에서 함께 강의하는 동료 선생님께서도 내 말투나 억양이 특이하다며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셨고, 외가댁이 마산쪽이라고 하면 단번에 이해하시는 눈치셨다.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억지로 따라 하려고 하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가족 중에 군인이 있나요?
가끔 듣는 질문 중에 하나.
말투에서 군인가정에서나 들을법한 말투나 표현이 들어있다고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아버지께서는 육사를 나오시고서 거의 40년 동안 군생활을 하시고 내가 유학을 떠나는 해에 예편을 하셨다. 뼛속부터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었나 보다. 군인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공감하며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딱 하나 나하고 안 맞았다고 한다면,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명령조가 섞인 말투가 정말 싫었던 것 같다. "물 좀 떠와 봐". 하나를 부탁해도 부탁이 아닌 명령이 일상이셨다. 나도 가끔은 어렸을 적 영향을 나도 모르게 보이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표현하려고 한다.
아버지의 직업과 어머니의 고향,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의 삶, 영어권과 독일어권에서의 삶... 이 모든 시간들이 오늘날 나에게 나만의 어투를 가져다주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다양함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지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왼손잡이였던 나를 오른손잡이로 고치셨던 친할아버지. 나도 전해 들은 얘기지만 예전에는 서울에서 사투리 쓰면 무시당한다며 마산에서 크고 자란 당신의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표준어를 쓰게끔 훈련시키셨다는 외할아버지.
[아내와 자주 가는 별다방]
오늘도 나는 집 근처 카페에 가서 당당하게 말한다.
"빵좀 떼파주세요."
...
비하인드 스토리
초등학교 시절 어린아이에게 3년의 미국 생활은 또다시 새로운 말투와 표현을 심어주게 되었다.
1) 결코 표준어와 표준말투를 사용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의 영향에 이어서 미국에서의 억양이 추가되었다. 워낙에 어렸을 때라 3년이란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초등학교에 갓 진학한 아이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동안 한국어와 영어를 반반 섞어가며 사용했었고, 완전히 한국어만 사용하는 경우는 지금까지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귀국하고 몇 년은 ㄹ에 R과 L발음이 과하게 섞여서 나왔다. 너무 어릴 때 영어권에 다녀왔기 때문에 회화는 많이 어색해졌지만 신기하게도 귀는 여전히 열려있다 (웬만한 건 다 알아듣는다는 소리다).
가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발음 때문에 아내에게 놀림을 자주 받는다.
2) 2년간의 군복무
군대에서 사용한 모든 문장은 "다. 나. 까."로 끝났다. 중대 최고선임이 되기 전까지는 상급자의 지시사항에 무조건 복창하며 따랐어야 했다. 가령, "너 오늘 점심 먹자마자 총기수입하고 관물대 정리해 놔!",라고 선임이 나에게 명령을 하면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예! 오늘 점심 먹자마자 총기수입하고 관물대 정리해 두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어야만 했고, 그게 습관이 되어 제대 후에도 한동안 말투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었다. 2년 동안의 군생활은 제대 후 사물함을 관물대로, 학번을 군번으로 쓰게끔 만들었다.
3)-1 성인이 되어 독일어권에서 약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새로 익힌 언어에 의해 나의 모국어는 또다시 혼란을 맞보았다. 분명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국어이지만, 문법체계와 표현은 독일의 것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귀국하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내 말투가 굉장히 어색하게 들린다고 했었다고 하니 분명 내 표현에 변화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3)-2 뒤셀도르프 | Düsseldorf. 내가 유학시절 처음으로 독일어를 배운 지역이다.
독일사람들도 나름 인정하는 독일의 표준어 | Hochdeutsch (Standard German)를 그곳에서 배운 덕분인지 아무리 말이 어눌해도 독일의 어느 지역에서 살아도 무시를 하는 현지인은 없었다. 심지어 유학 2년 차에 입학 면접으로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음악대학에선 서독(뒤셀도르프는 독일의 서쪽 지역에 위치해 있다)에서 익힌 독일어 덕분에 면접 분위기는 다행히도 좋게 흘러갔고, 남은 유학생활을 그곳에서 보낼 수 있었다. 참고로, 작곡과 입시는 워낙에 복불복이 심해서 어떤 이유로 최종적으로 합격불합격이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요즘은 어떻게 입시결과를 받아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학교로부터 주로 편지로 통보를 받았다. 장문의 편지도 아니었고, 첫 문장만 읽어보면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축하합니다!로 시작하면 붙은 거고, 안타깝게도...로 시작하면 떨어진 거니 나머지 내용은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입시를 준비하던 당시, 음악계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에 의하면 내가 제출한 작품에 대한 질문이 단 하나라도 없고 뻔한 얘기만 오고 가면 (물론 학교마다 다를 수 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보통 어렵다고 했었다.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내가 어떻게 붙을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지금도 감사한 건 내가 표준독일어를 배우길 잘했다는 것이다. 독일어권 지역 어디를 가도 반드시 듣는 질문이, 독일어를 어디에서 배웠냐는 것이었다. 뭐, 오스트리아로 옮긴 뒤 유학이 끝나갈 무렵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스트리아 사투리를 쓰고 있었지만.
...
글을 마치며...
표준어면 어떻고 사투리(혹은 방언) 면 어떠하리. 언어는 어느 지역이건 그 지역의 고유하고 중요한 문화적 재산이라 생각한다. 글을 쓰다가 마침 궁금해서 인터넷에 의미를 찾다 보니 방언, 사투리, 억양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하고 있었다. 방언이라고 하면 특정 지역이나 계층에 의해 쓰이는 말의 체계라고 하고, 사투리는 지역 방언 중 표준어가 아닌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심지어 억양은 특정 지역이나 계층 특유의 발음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사투리보다는 방언의 하위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