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퇴사가 가져다준 것들
마흔 다섯이었던 남편은 더 이상 직장을 다니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후 다음 해에 퇴사를 했고,
내가 대신 직장에 다니고 남편은 육아와 집안일을 맡기로 했다.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어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하지 않고
나름 육아와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 당당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평소에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채소 위주로 아이에게 밥을 차려주었고
아이는 아빠가 해 준 음식을 또 잘 먹었다.
아이가 아프면 여기 저기 수소문해서 좋은 의사 선생님이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고,
유치원 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받아서 잘 먹이고 돌봤으며,
학교를 들어간 후에는 자전거로 바래다주곤 했다.
물론 학부모 모임이나 기타 내가 챙겨야 할 것은 챙겼으나
물리적인 시간이 더 여유로웠던 남편이 육아의 큰 부분을 맡자 내가 훨씬 수월했다.
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돌봄을 둘 다 받으며 큰 동요 없이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해 나갔다.
게다가 집안일이라고는 내가 지시한 것 밖에 하지 못하거나
쓰레기 분리 수거 정도의 일이 대부분이었던 남편은 점점 집안일의 스킬이 늘어났고,
저렴한 제품을 파는 마트를 두루 섭렵하고
꼭 필요한 청소 용품 등을 잘 골랐다며 만족해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공부를 시작했다.
그 전에 배웠던 전공으로는 취업하기도 힘들었고
경력도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자신이 해 보고 싶은 것에 도전하겠다며 사이버 대학에 들어갔다.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는 꽤나 사교적이라 학교 정보며 시험 정보도 열심히 듣더니 성적도 꽤나 잘 나왔다. 장학금도 타고, 자격증도 따고, 간간히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며
아이 육아며 학업, 직장을 오가며 바쁘게 보냈다.
남편은 그동안 회사에서 혹사 당하느라 빼 먹히기만 했던 껍데기를 점점 채워갔고,
나는 사회 활동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면서 제대로 돈을 버는 법을 배워갔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흘렸다.
나는 회사에서 쌓은 노하우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구상해서
나만의 커리큘럼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은 여러 일을 섭렵하다가 자격증을 딴 후에는
그가 그동안 바라던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서 나름 만족도 있게 직장 일을 하고 있다.
월급은 적지만 들어간지 1년만에 우수 사원으로 상도 받고
일과 관련해서 더 공부하고 싶다며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그리고 또 3년이 흘려 이제 그 대학원도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다.
남편의 그 전 회사에서 버티고 버티던 동료들도 거의 다 그만 두었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퇴사 전 남편이 터널처럼 끝이 보이지 않던 그 힘겨운 시간을 내려 놓고
나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 하려고 결심했던 그 순간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마흔 다섯에 보이지 않던 길에서 돌아서서 다른 길을 찾으려고 했다.
사실은 몇 년 전부터 그 길을 멈추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가장의 책임때문에
버티고 버티면서 억지로 자신의 길이 아닌 곳을 힘겹게 걸아가고 있었다.
몇 년은 아이 키운다는 핑게로 외면했던 힘겨워 하던 그의 모습,
퇴사하기 전 1년간 영혼없이 껍데기같이 누워서 TV만 보던 그 눈빛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과제를 하느라 시간 가는줄 모른다. 그 집중하느라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서.
남편이건, 아내이건 어느 시기에는 채워줘야 하는 시기가 온다.
내가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이 채워질 때 까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던건
내 남편이 나와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서 책임지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을 경제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은 내 인생이 무거워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겁다고 해서 인생이 불행해진다는 뜻은 아니다.
무거운 만큼 진지해지고, 성실해지고 무엇보다 밥그릇을 지키려다보니 점점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이 쌓인다.
회사 다니는동안 나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 배우고 깎이면서 나름의 노하우를 쌓았고
독립하고 스스로 내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여러모로 남편의 퇴사는 우리 가정에 새로운 프레임을 가져다 주었고, 둘 다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가끔 아직까지도 남편이 전 회사에 다녔으면 어땠을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말의 끝에는 항상 남편이 하는 말이 있다.
"그 나이에 나오길 참 잘했지. 안그랬으면 어쩔뻔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마흔 다섯은 퇴사하기 딱 좋은 나이다.